한국패션업계의 선구자 ‘나의 어머니 최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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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장
전 (재)국제패션연구진흥원 이사장

한국패션업계의 선구자이신 어머님에 대해 원고청탁을 받아 다시 한번 기억을 더듬어 그분의 업적을 정리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고맙게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아무리 훌륭한 분이라도 가족의 입장에서 보면 그 훌륭함이 그리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나 또한 그러하겠지만 그분이 하신 일을 하나씩 정리하다 보면 패션분야에 관해선 무엇 하나 국내에서 처음으로 하지 않은 분야가 없다는 것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의 모친의 고향은 사과 맛이 좋기로 유명한, “맨발벗고 30리를 뛰는 사람들”이라고 했던… 강인한 곳, 안변이다. 외할아버지는 글 읽는 것을 좋아하고 시를 좋아했던 낭만적인 분이라 한다. 나에게도 항상 이야기해주시던 외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시는 어머니의 어린 마음에 가장 가슴에 와 닿았던 것 같다.

“巖下細泉 達海意 庭前半樹 衝天心”

바위 밑에 흐르는 작은 샘은 큰 바다에 이르는 것이 그 뜻이요,

뜰 안의 작은 나무는 하늘을 찌르고자함이 그 소망이다.

외할머니는 11남매를 낳으셨고 그중 다섯만이 살아남았으나 나의 어머님은 남은 5남매 중 넷째였다. 어릴 때의 이름은 ‘보배’, 허나 어머님은 그 이름이 싫었던지 당돌하게 외할아버지에게 제안했다. “아버지 저는 ‘보배’라는 이름이 싫으니 ‘경자’라는 이름으로 바꿔주세요” 오늘날에도 용납하기 어려운 딸아이의 요구를 외할아버지는 들어주셨다.

어머님은 남에게 공경 받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본인의 희망대로 평생을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살아오셨다.
1927년에는 선교사들이 세운 원산에 있는 루씨여고를 다니게 된다. 이때 하숙집 아주머니에 대한 동정에서 비롯된 여성의 삶에 대한 성찰은 여성에게 경제적인 힘이 얼마나 중요한가, 여성은 경제적인 능력을 갖출 때 비로서 자신의 참다운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재확인하며 여성인력의 교육에 뜻을 두게 되며 그 결과 오늘날 수많은 직업여성을 배출해 내게 되었다.
1932년 일본 동경 무사시노 음악학교에 진학하나 고향집이 불이 났다는 소식에 피아노를 팔아서 1933년에 오자노미즈 양재학교에 입학하게 되며 이때부터 음악전공에서 양재전공으로 바뀌면서 그 어려웠던 시련이 더 큰 기회로 전환하게 된다.

1938년 3월 한국 최초 함흥 양재학원 설립

1937년 귀국 후 다음해인 1938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함흥양재학원을 설립한다. 이는 지금의 국제패션디자인학원(국제복장학원)이다. 해방이후 조선인민위원회의 압박에 못 이겨 월남을 하기 위해 해주로 이사를 하고 그곳에서 배를 타고 남쪽으로 가기위해 갯벌을 걸어가다 나를 업고 있던 어머님이 뒤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이때 내가 울기라도 하는 날에는 우리 식구가 다 죽을 수밖에 없었다.
다급했던 어머님은 3살짜리 나에게 사정을 했단다. “현장아 울면 안 돼. 네가 울면 우리는 모두 죽는다.” 그러자 놀랍게도 내가 “네”하고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고 살아 계실 때 기회만 있으면 주위사람들한테 나 때문에 공산당의 감시망을 뚫고 배에 탈수 있어서 내가 우리가족을 살렸었다고 자랑을 하셨고, 그래서인지 가족 중에서 나를 제일 귀해 하셨던 것 같다.
다행이도 서울에서는 이미 작은아버님이 자리 잡고 있어 오빠의 도움으로 학원을 시작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힘들게 내려와 학원도 안정될만하니 6·25가 터지고, 1·4 후퇴 때는 대구로 가서 처음부터 다시 또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대구에서 국제양장사를 열어 한창 번창일로에 있을 때 서울에서 꽃을 피우다만 양재학원에 대한 미련 때문에 1954년 환도를 하게 된다.
전쟁으로 인해 많은 파괴를 당했어도 그래도 명동은 서울의 중심이었기에 지금의 Les More자리(전 에스콰이어자리/명동2가 51-1)에 자리를 잡았다.

명동에 자리잡은 국제양장사

나는 이북 함흥에서 태어났기에 이곳이 나의 본적지로 되어 있다. 그 당시 맞은편으로는 ‘한’양장점과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송옥’양장점이 있었다. 처음 자리 잡았을 때 명동의 초라한 모습은 국제양장사의 발전과 더불어 눈부시게 변모하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전화가 드물어 많은 찻집이 출현했으며 그 중에도 국제양장사 3층에 있었던 청동다방은 공초 오상순선생이 항상 자리하던 곳이었다.
1950년대 만해도 우리나라 여성잡지에서는 패션화보라는 것이 없었다. 당시 여성지라고는 ‘여원’뿐이었는데 기자였던 박상기씨가 명동을 드나들면서 국제양장사의 쇼윈도를 보고 국내 최초로 시도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모델로는 당시 최고의 배우였던 최은희, 노경희가 맡았다.
우여곡절 끝에 1955년 11월호 여원에 실린 여성 모드란은 국내 최초의 패션화보로서 그야말로 대단한 선풍을 일으켰다. 그 후로는 매달 3~4페이지의 패션화보가 실렸고 ‘여원’의 뒤를 이어 다른 잡지에서도 화보란을 신설하기에 이르렀다.
그즈음 국제양장사 건너편에 아리사양장점이 문을 열게 되면서 그 주인인 서수연씨와 ‘대한복식연우회’라는 디자이너들의 모임을 국내 최초로 결성하게 되었다. 초대회장은 최경자, 부회장 서수연, 회원으로는 지금에도 귀에 익은 석주선, 김교옥, 김경애, 권갑순, 서상국, 박순기, 최숙현, 석춘복, 최복려, 한희도, 방재숙씨 등이다.

『여원』지에 시도한 패션모드 디자인
(디자인 최경자, 모델은 톱스타 최은희)
1959년 미8군 패션쇼를 마친 후 앙드레김과 함께
(맨 우측, 최경자)

1957년 대한복식연우회에서 국내 최초로 바자회를 열었고 그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또한 당시 복식계에서 쓰이는 말은 100%가 일본어였다. 이를 우리말로 바꾸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였으며 또한 문교부의 양재술어편찬위원회와도 같이 많은 노력을 하여 그 후 1976년에야 겨우 결실을 보게 되었다.
그 당시 복식계에는 대한복식연우회와 한국디자이너협회가 있었는데 정부의 통합령에 따라 그해 모임을 갖고 사단법인 대한복식디자이너협회를 창설하였고 총선을 거쳐 최경자를 초대 회장으로 선출하였다.
1957년 10월 반도호텔 다이네스티 룸에서 최경자 첫 패션쇼가 열렸다. 피난길에서 서울로 돌아온 후 어렵게 시작한 양장점이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디자이너로서 쌓아온 모든 역량을 한시간 내에 보여주는 것이니만큼 많은 심적 부담을 가짐과 동시에 최상의 희열을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라 하겠다. 그때에 점원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던 앙드레김의 즐겁게 일하던 모습은 당시 국민학생이던 나의 눈에 아직도 선하다.
1950년대는 전쟁이 남긴 폐허를 디디고 일어나 좌절하지 않고 1960년대의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하다.
1950년대 말부터 사회 전반에 걸쳐 걸음마를 시작한 우리나라는 1960년대 들어오면서 패션계 역시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맞춰서 나날이 발전해 가고 있었다.
1950년대가 양장의 합리성을 이해하고 조금씩 받아들임으로서 양장과 친숙해지기 시작한 시기라면 1960년대는 이제 패션 문화를 받아들이려는 욕구가 본격화된 시기였기에 우리나라의 패션계는 1960년대를 기점으로 눈부신 도약을 하게 되었다.
국제양장사의 명성이 널리 퍼지고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는 자신이 붙자 어머님은 양장의 원 고장이라고 할 유럽과 미국을 가봐야겠다는 강한 욕구가 생겼다. 허나 당시에는 해외여행이 원한다고해서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당시 미국 콜로라도 덴버시에서 국제가정학회 총회가 열리게 되면서 가정학회 회원자격으로 초청을 받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된다.

4·19 직후 1960년 6월 드디어 늦게나마 패션의 본고장이라 할 미국과 일본, 유럽의 여러 나라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선진 패션문화를 직접 피부로 느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본인의 가슴을 마냥 부풀게 만들었으리라…..
요즈음도 외국에 나가면 배울 것이 많은데 하물며 1960년도에는 상상이 안갈 정도로 느끼는 점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장기간의 여행을 마치고 가장 강하게 마음에 와 닿았던 점은 첫째 당시 우리나라 디자이너의 위상에 대한 것이며 둘째는 유럽과 미국에서의 새로운 느낌도 물론이었지만 너무나 달라진 일본의 변화였다.
그때 만해도 우리나라에서는 디자이너라는 명칭을 듣기가 어려웠다. 그보다는 ‘양장점아줌마’라는 명칭이 더 잘 통했었다. 게다가 일을 배우는 과정 자체가 마치 고행 같아서 심지어는 주인에게 매를 맞아가면서 배우는 일도 많았다. 우리나라 디자이너의 현실을 생각하면 서글퍼지며 마음 한구석에 접어두었던 양재학원 설립에 대한 꿈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마지막 여행길에 들른 동경은 옛 공부하던 시절로부터 이미 30년이 지났지만 그렇다 해도 일본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양재학교 수가 전국에 무려 2,700개나 되며 학생수도 50만명을 웃돌았다. 양재학교로 가장 널리 알려진 문화복장학교는 당시 개교 37년 동안 이미 13만명을 배출하였고 재학생도 무려 1만5천명이나 되었다. 이러한 일본의 발전상을 보면서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면 우리나라에 진정한 복장문화의 씨를 뿌리겠다는 다짐을 다시 하게 된다.
현재 국제양장사의 주인으로 살면 돈도 벌고 디자이너로의 명예도 얻겠지만 옛부터 꿈꿔왔던 여성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양재교육의 길은 그 어느 것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국제양장사를 정리했다. 일단 결정을 하면 이것저것 재는 일없이 하나에만 몰두하는 성격이기에 또한번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었다. 폐허나 다름없던 명동에서 시작하여 이제는 확고하게 자리 잡은 국제양장사를 아무 미련 없이 6년 만에 정리하고 국제복장학원의 간판을 내걸었다.
제1회 입학생은 15명이었다. 그 가운데는 그동안 국제양장사에서 디자이너의 꿈을 키워왔던 앙드레김 등 그들 대부분이 이제는 대한민국의 1세대 디자이너가 되어 한국패션을 이끌어가고 있다. 국제복장학원을 시작할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의 양재교육이란 그저 옷감을 재단해서 바느질하는 법 이외에 색채학 정도를 가르치는 정도였다.
사실 한 벌의 의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디자인을 하고 이를 표현하여 이것을 보고 제작을 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아름다운 집을 짓기 위해서는 정확한 설계도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없었다. 당시에는 이 표현하는 방법이 없어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많은 카다로그 잡지 등을 보고 옷을 주문하였었다.
항시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해 오던 중 해외여행을 통해 외국에서는 이미 스타일화라는 과정을 통해 이 표현을 완벽히 해결해 왔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번에 한국에 돌아가면 반드시 스타일화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야겠다는 다짐을 하였었다. 하나 막상 가르치려고 보니 아무도 경험이 없어 가르칠 선생이 없었다.
그때 당시 마침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종하 화백에게 이 스타일화의 필요성과 가르쳐야 할 내용과 요점들을 설명드리며 상당기간의 조율을 통해 드디어 국내 최초의 스타일화과를 신설했다. 1964년 국내 최초의 스타일화 전시회, 1965년 국내 최초 한·미·일 스타일화 전시회를 갖게 된다.

1961년 스타일화과가 개설된 이후 1965년 4월 15일 국내 최초로 한·미·일 합동 스타일화전을 개최했다.
1963년 데이진사가 주최한 한일패션쇼 포스터

1963년에는 일본 섬유메이커 데이진이 주최한 한·일패션쇼가 일본 아카사카 프린스호텔에서 5월에 있었고(이방자여사도 참가하여 많은 인기를 얻었음) 한국에서는 6월 8,9일 시민회관에서 열렸다. 특히 8일에는 3,000여명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어 당시의 패션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겠다.
이 행사를 계기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전문모델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일 패션쇼에 참석한 우리측의 모델이 영화배우나 미스코리아 출신이었던데 반해 일본 측은 전문모델들이 나와 쇼를 더욱 빛내 주었는데 이는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우리나라의 패션계를 이끌어가던 모친은 이를 계기로 전문적인 모델을 양성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된다. 패션쇼가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려면 전문패션모델이 필요하다는 생각, 그리고 우리나라 패션계가 좀더 발전하려면 훌륭한 디자이너 못지않게 전문적인 모델을 양성해야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에 1964년 국내 처음으로 국제차밍스쿨을 내게 된다.
1990년대 초 SBS슈퍼모델선발대회도 국제차밍스쿨을 지정교육기관으로 출범한다. 그 당시 졸업생들 중 모델라인의 이재연과 모델센터의 도신우를 포함해 그들 대부분이 이제는 대한민국의 1세대 한국패션 모델계를 이끌어가고 있다.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디자이너들의 활동이 늘어나고 디자이너에 대한 사회인식도 뚜렸한 변화를 보였고 양장점 주인이라는 호칭에서 디자이너라는 전문직종이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는 사단법인 대한복식디자이너협회로 통합된 이래 디자이너의 지위와 자질향상을 위해서 뜻을 같이한 회원들에게도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원로 디자이너들은 용기를 얻어 신인들을 발굴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고 1965년 국내 최초로 ‘전국디자인콘테스트’가 열리게 되었다.
1966년 태국에서 동남아 박람회가 열렸었다. 한국패션산업의 소개로 한국관에서 패션쇼를 하게 되었는데 의외로 너무나 좋은 반응으로 방콕 프린스호텔과 엘리펀트호텔에서 별도의 행사를 가졌었다. 태국인들의 옷차림도 새롭게 보였지만 정작 충격을 준 것은 시내 책방에서 발견한 신문지 같은 종이에 의상에 관한 토막 소식과 간간이 사진도 실려 있는 의상지였다.
패션문화가 우리보다 뒤떨어진 이 나라 사람들은 하고 있는데 그동안 마음에 담고 있던 나는 무얼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생각에 할 말을 잊으셨다. 모친은 동남아 박람회를 무사히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의상지 창간을 서두루기 시작했다.
의상지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 데에는 학원을 운영하면서 얻은 경험도 일조를 했다. 복장학원을 찾아와 직접 배우는 사람뿐 아니라 가정주부 등 학원에 다닐 형편이 되지 않을 사람들에게 양장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심어주고 최소한의 기술을 가르쳐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늘 고심했다. 드디어 국내 최초의 패션전문지 ‘의상계’는 이러한 생각과 위기의식이 모여서 1968년 창간호가 나왔다. 표지모델은 윤복희, 의상은 박윤정씨가 맡았다.

1964년 3월 30일 국내 최초로 창설한 국제복장학원의 차밍스쿨
1968년 창간된 「의상계」 표지

이렇게 모든 애정을 바쳐 우리나라 최초의 의상전문지라는 자부심으로 모든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며 발간해오던 ‘의상’지는 1982년 12월호를 마지막으로 송별호를 내고 그 후 동아일보사에 인수되어 ‘멋’이라는 제호로 명맥을 유지시켜 갔지만 그것도 역시 십 수 년 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휴간되고 말았다.
1977년에는 마침내 당시로는 숙원사업이었던 100억불 수출을 달성했다. 그 가운데 섬유수출이 차지하는 비율이 전체의 3분의1을 차지했으니 섬유패션산업은 그야말로 수출 산업의 근간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수출 붐에 부응하여 1977년 7월에 한국여성실업인협회(후에 한국여성경제인협회로 개칭)가 창립 되었고 초대회장으로 최경자가 선임되었다. 당시 하고 있었던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려서부터 여성들의 경제적 자립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던 모친으로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자리였다.
그때의 여성 실업인들의 사업규모는 지금과 달리 그리 방대하지 않았기에 전시회라든가 바자회등의 다른 방법을 통해 그 사업방향을 넓혀 나갔다.
초대회장을 하며 절실하게 느꼈던 부분은 섬유수출이 차지하는 비율이 전체의 3분의1을 차지한다 하더라도 대부분이 저가상품들이라 이 부분에 대한 해결책이 시급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고급인력을 양성하여 디자인을 인정 받을 수 있는 상품을 개발함으로서 업계가 고가의 상품을 수출할 수 있는 상황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른 해결책으로 1980년 5월 재단법인 국제패션디자인연구원(이후 국제패션연구진흥원으로 개칭)을 국내 최초로 상공부(지금의 지식경제부) 산하 고급인력양성기관으로 설립하게 된다.
다음해 1981년 11월17일 국제패션디자인연구원 주최, 신세계백화점 주관, 주한 프랑스대사관 후원으로 신라호텔에서 ‘피에르 가르뎅 간담회’를 가졌다. 현대패션의 창시자이며 기업가이기도한 그와의 간담회를 한국에서 갖는다고 하는 것이 한국패션업계에 너무나 흥분되고 고무적이었다.
고가제품을 만들려면 고급인력이 있어야하며 고급인력의 양성은 많이 배워야 했기에 연구원의 입학자격을 처음부터 전문대학 졸업자 이상으로 제한했다.

1984년 11월 17일 피에르 가르뎅 옆에서 간담회를 진행하고 있는 최경자, 그 우측이 유한섬 신세계백화점 사장
국체패션연구원 졸업식을 끝내고 초청인사와 함께

당시 전국에 많은 대학들이 생겨나면서 대학마다 학생증원을 위해 많은 학과증설을 하면서 의상학과도 많이 늘어났다. 그에 따른 능력있는 교수진 부족으로 수업내용의 부진함에 당시의 학계 분위기는 의상과 대학을 나와도 국제패션디자인연구원을 다녀야 한다는 것이 전체적인 추세였기에 1차 모집이후 상당 기간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20여년이 지난 2000년이 들어오면서 이러한 분위기는 점차 수그러지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세월이 지나면서 각 대학 나름대로 전과 달리 수업내용도 충실해지고 교수진도 인정받는 분들로 교체되면서 연구원의 필요성이 위축되어 2008년 후기에 (재)국제패션연구진흥원은 청산하게 된다. 초기의 이상봉, 박춘무 등을 비롯한 많은 국제패션디자인연구원 졸업생들은 대한민국의 2세대 디자이너로서 현재 한국패션을 이끌어가고 있다.
2005년이 접어들면서 어머님은 약간의 뇌졸중을 넘기면서 점차 사회생활을 하기 힘들어지셨다. 건강이 점차 안 좋아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패션업계는 타계하시기전에 마지막으로 현 패션계의 대표 패션디자이너들의 합동 헌정패션쇼를 2008년 5월20일 하얏트호텔 그랜드볼룸에서 대대적으로 개최했다.
‘최경자선생 헌정패션쇼’는 헌정패션쇼 조직위원(위원장 안윤정)이 주축이 되어 (재)국제패션연구진흥원과 국제패션디자인학원이 주최, SFAA, KFDA, FGI, NWS가 주관했으며 롯데, 신세계 백화점이 함께 협찬했다. 더불어 패션업계의 원로들이 고문을 맡아 큰 행사를 매끄럽게 준비하는데 각각의 역할을 일임했다.

‘최경자선생 헌정 패션쇼’를 마치고 참가 디자이너들과 기념촬영

제자만 해도 2만여명, 한국의 대부분의 유명디자이너가 제자이다.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까지, 과거의 모델들과 현재의 A급 모델까지 아무런 대가없이 참여해 한국의 패션 역사를 대변하는 패션쇼에 헌정했다.
그리고… 2010년 4월25일 ‘나의 어머니 최경자’는 100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대한민국 패션인葬’으로 지냈으며 장례식장은 서울 신촌 연세장례식장, 장례위원장은 한국패션협회 원대연회장과 대한여성경제인협회 안윤정 회장이었다. 장례식날 국제복장학원을 졸업한 후 거의 찾아오지 않던 앙드레김이 불편한 몸을 부축 받으며 대형 꽃다발 2개를 영정사진 옆에 놓고 절을 올렸다. 몇 개월 후 그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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