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요한(鄭耀翰·John Chung)의 인생 역전
– 북미 최초 하와이 사탕수수밭 이민자 2세

- 미주 최초 이민자의 가족사

0
582
정요한 옹 부부
송광호
재외동포저널 편집고문
이 글은 고인이 된 鄭옹(당시 94세)이 타계하기 2년 전 필자와 10여 차례 가진 개인 인터뷰를 통해 밝힌 최초의 미주이민 개인가족사를 기록한 내용이다. 미 샌프란시스코 부근 작은 마을 태생인 정옹은 구한말 최초 미(하와이) 이민 1세인 정봉규(도산 안창호의 재정부장)씨 외아들로 태어나, 일제강점기 가족 전체가 부모 고향인 평양으로 재이주하면서 파란의 삶을 걷게 된 한인교포2세다.
6·25전쟁 시기 일본과 미국생활을 거쳐 지난 1970년 은퇴해 캐나다에 정착했다. 그후 만 43년간 줄곧 토론토의 한 아파트에서만 부인 장인선(89세)씨와 거주하다 별세했다.
정옹이 겪은 한 세기에 가까운 격동의 인생살이(4개국 거주)를 통해 지난 1920년대 미주 이민초창기 한인동포생활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전후 시대상황과 오늘의 관련역사 등을 엿보기로 한다.

1905년 사탕수수밭으로

금년 내 나이 만 94세(1918년생)이다. 태어난 곳은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영어 이름은 쟌 정(John Chung). 한국명은 정요한(鄭耀翰)이다. 북미에선 그저 ‘쟌’이라고 부른다. 아버지 이름은 정봉규(鄭奉奎)로 고향은 평양이다. 부친은 지난 1905년 미 하와이 사탕수수밭 첫 노동계약으로 진남포(북한/현재 남포로 개명)항을 떠났다.
부친 사연부터 잠깐 언급하는게 좋겠다. 북미 최초의 한인 1세 이민자인 부친은 1881년 생이다. 부친은 24세 때(한일합병 이전) 미 하와이로 갔다가 2년 뒤 캘리포니아주(州)로 옮겨 미 본토에서 25년간을 살았다. 캘리포니아에선 농장노동자 생활을 했다.

부친 정봉규(도산 안창호 재정부장)의 대한제국 여권

부친은 중노동을 하며 돈을 한 푼씩 아껴 모았다. 그 돈을 불려 수년 후엔 농장을 구입하고 멕시코인들을 고용해 농장경영을 했다. 문맹자로서 비록 학문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무척 이재(理財)에 밝아 먼저 농장주가 되는 등 남보다 재산축적이 빨랐다고 한다.
부친은 지인소개로 사진을 통해 평양출신 어머니(현미선, 1898년생)를 초청해 결혼했다. 서울 진명여고를 나온 어머니는 17세 연하로 지식인에 속했다. 당시 어머니가 한국을 떠날 때는 샌프란시스코로 오는 직항교통편이 없었다. 어머니는 배를 타고 중국 상하이로 가서 다시 기선으로 갈아타고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1914년 10월 샌프란시스코에 닿았다.
아버지를 첫 대면한 어머니는 무척 실망했다고 한다. 얼굴은 사진보다 못생기고 늙었으며 키도 작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그해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에서 식을 올렸다. 그때 부친 나이 만33세, 모친은 16세였다.

사실 부친에 대한 옛 과거일은 자세히 모른다. 조선말기 군인이었다는 말을 얼핏 들었을 뿐이다. 고종(대한제국)당시 군인직업을 잃고 미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고 있다. 부친 여권 원본에는 대한제국발행(249호) 광무 9년이라 적혀 있고 1년 유효기간으로 진남포에서 하와이 행으로 적혀져 있다.
부친은 도산 안창호선생과 고향이 같은 평안도라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캘리포니아에 살 때 도산(島山)과 자주 만나던 일을 지금도 분명히 기억한다. 부친은 도산의 재무를 맡고 있었고 부친과 함께 가끔 LA를 방문하면 꼭 도산 집에 머물렀다. 그래서 할리우드 유명 영화배우였던 도산 아들 필립 안(安)도 기억한다. (부친은 당초 문맹이었으나, 하와이 시절부터 고된 노동일 후에도 밤늦게까지 글을 익히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한글과 영어를 겨우 깨우칠 수 있었다고 한다.)
부친은 “나는 공부를 못했지만 도산을 어떻게든 도와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1920년대 부친은 흥사단을 조직한 도산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것 같다. 도산은 우리가 이사한 지역으로도 몇 번 찾아왔다. 당시는 교포지도자들끼리 당파싸움이 무척 심했던 것 같다. 오늘날도 우리 한인교포끼리 곧잘 다투지만 그때도 어른들 파벌싸움이 심했고, 그 중심엔 항상 이승만 이름이 오르내렸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3·1독립만세 사건 전(1918년)에 태어났다. 내 위로는 누님 두 명 뿐으로 형제없이 외아들로 살아왔다. 1919년 3·1운동을 기념해 1920년대부터 매년 삼일절이면 한인들이 LA에서 퍼레이드를 가졌다. 어머니랑 10여명 한국여인들이 하얀 옷을 입고 대형태극기를 앞세워 행진하던 모습도 어렴풋이 회상된다.

내가 4살 되던 해 우리 집은 디누바(Dinuba)라는 소도시로 옮겼다. LA에서 북서쪽으로 약 240㎞ 떨어진 곳이다. 거기서 부친은 조그만 식품점을 열었다. 디누바에는 약 1백여 명 한인교포들(대부분 농장노동자)이 거주했고 한국감리교회도 세워져 있었다.
그때 앨리스 장(Alice Chang)이라는 같은 또래 한국소녀를 알게 됐다. 우린 유치원과 초등교1년 때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3년 뒤 우리 집은 또 다시 캘리포니아 스탁톤(Stockton)이란 도시로 이사 가면서 그녀와 헤어져야 했다. 언제나 조용하고 말없던 앨리스. 아주 오래전 어린시절이었는데도 그 소녀 이름과 모습이 아련하게 회상된다.

북미주 첫 한국식품점

부친은 스탁톤으로 온 후 시내에 대형 한국식품점을 개업했다. 아마 그 당시엔 북미주 첫 한국식품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디누바 가게 때보다 규모가 몇 배나 컸다. 품목별로 생선, 정육, 채소, 과일, 아이스크림, 소프트드링크, 각종 깡통제품 등 전부 구비해 놓았고, 유조 나까시마라는 일본인도 고용했다. 부친은 아침 일찍 도매상에 가서 물건들을 사갖고 오면 어머니는 가게 뒤 목욕탕에서 야채 등을 다듬어 선반에 진열해 놓곤 했다.
이때 나는 프랜클린 초등교 2학년이었다. 마침 같은 반에 한국학생이 2명 있었다. 이름이 에드워드 문과 윌리엄 박이다. 우리 셋은 1주일 내내 휴일에도 함께 뛰어다녔다. 방과 후에는 매일 오후 4시부터 5시까지 1시간씩 교회에서 가르치는 한글도 배웠다. 한글은 김택(Kim Tak)목사님이 직접 가르치셨다.
우리들은 대부분 시간을 강가를 뛰어다니며 롤러스케이팅, 자전거타기 등과 시내 풀장에서 수영하면서 보냈다. 또 우리 삼남매는 학년이 올라가면서 음악에 조예 깊은 어머니 요구대로 악기를 익혔다. 큰 누님(Vada)과 나는 피아노, 작은 누님(Anna)은 바이올린을 배웠다.
이때 내 소원은 장래 비행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1927년 찰리 린드버그라는 미 비행사의 세계최초 대서양 횡단비행이 당시 국제적인 큰 화제였다. 1928년 중반 실지로 린드버그가 비행하는 ‘Spirit of St. Louis’라는 항공기가 우리 가게 위로 양 날개를 흔들거리며 저공비행하는 것을 목격해 더욱 비행조종사가 멋있게 생각됐다.

초등교 5학년 때다. 부모는 가게를 완전 정리하고 고향인 평양에 되돌아가기로 결단을 내렸다. 요즘 말로 역이민인 셈이다. 향수에 젖어 남은 여생(餘生)은 친척과 친구들이 있는 고향땅에서 보내기로 결심한 것 같다. 그것은 평양 친척에게 계속 송금함으로 따로 우리집 마련을 부탁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9년 9월 드디어 우리가족은 미국생활을 완전 청산하고 조선 땅으로 떠났다. 하와이 사탕수수밭 첫 이민 1세 꿈을 접고 부친은 만 25년간의 미주생활을 마감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부두에서 배(Taiyo Maru of the NYK Line)를 타고 일본 요코하마로 향했다.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샌프란시스코만(灣)에서 태평양으로 진입하는 갑판 위에 서서 구름아래 지는 태양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서글픔을, 11세 어린 나이지만 새로운 미지(未知)의 땅에 대해 뭔지 거북하고 불안한 느낌을 맘 속에서 끝내 지워버릴 수 없었다.
배는 하와이 호놀룰루까지 5일 걸렸다. 우리 선실은 3등 실로 배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선실이 컴컴하고 습기 차고 냄새가 났다. 우리 삼남매는 이런 방이 싫어 하루 종일 갑판위로 나다녔다. 어머니는 배 멀미를 앓아 꼼짝 않고 침대에만 누워 계셨다. 3등실에는 12명의 손님이 있었는데 식사는 밥과 된장국과 단무지 뿐이었다. 우리 남매는 배 밑 나쁜 공기가 싫어 내내 선실 밖에 나돌다가 잠자는 시간에야 방에 돌아오곤 했다.
10일 후 마침내 일본 요코하마에 닿았다. 일본에 유학중이던 친척아저씨가 마중나와 약 이틀간 시모노세키 등을 관광했다. 그리곤 페리를 타고 부산항에 닿았다. 페리에선 일본 사복형사 2명이 영어로 심문했다. “어디서 오느냐” “어디로 갈 예정이냐” 등등.
부산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향했다. 평양역에는 친척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아버지 쪽 친척은 누이동생 외에 거의 없다시피 했고 전부 어머니 친척들이었다. 감격적인 상봉 후 어머니 친정집에서 이틀간 지낸 뒤 친척이 사둔 우리 집으로 갔다. 부친이 미리 집 값을 보내 어머니 친척이 장만한 집이다.
우리 집은 아주 작고 초라했다. 대문조차 없었다. 부친은 화가 잔뜩 났다. 충분한 돈을 보냈는데 집이 너무 보잘것 없어 마음을 상한 것이다. 그때도 국가별 돈 환율이 있어 미국과 아주 못살던 조선과는 상당한 금액 차가 있었다. 부친은 친척이 거의 없어 인텔리 가정인 어머니편으로 돈을 송금한 것인데, 집 구입 문제부터 어긋나니 다시는 어머니쪽 친척들을 신임하지 않았다.

한글과 일본어 동시 학습

나는 평양에 올 때 미국에서 초등교 6년을 올라가기 직전이었다. 초(소학)교 편입을 위해 한글시험을 봤더니 실력이 엉망이었다. 미국에서 목사님에게 틈틈이 배운 내 한글 실력은 수준이 하급학년 정도도 안됐다. 더구나 일제강점기 시절이라 필수로 일본어까지 따로 배워야 했으니 어린 나로서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
나는 부모가 정해준 가정교사를 두고 매일 언어공부에 매달렸다. 숭덕소학교에 입학하니 같은 반 학생들 중엔 나이가 많고 개중엔 결혼한 사람까지 있었다. 대부분 남학생들이 머리를 여자처럼 뒤로 길게 땋고 있었다. 당시의 조선풍속이었다.
문제는 공부뿐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부잣집아들이 왔다는 소문 때문인지 나를 괴롭히는 한 아이가 있었다. 고씨 성을 가진 목사아들이었는데 내게 매일 집에서 돈을 가져오라며 칼로 콕콕 찌르고 위협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돈을 몇 전 달라고 졸라서 목사아들에게 갖다 주곤 했다. 이런 날이 계속되니 아버지가 이상하게 생각됐던지 “왜 너는 돈을 매일 달라고 하느냐”고 물었으나 그런 위협받는 속사정을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집에 와서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자”고 거의 매일 부모에게 울면서 졸랐다. 이런 생활이 근 2년간 계속됐다. 한국말, 일본말로 공부하기도 힘들었지만, 그 목사 아들의 괴롭힘은 일생 내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80여 년 전 옛 일이지만 나는 지금도 그때 그 속상하던 일을 결코 잊지 못한다. 또 그로 인해 나도 모르게 한국 사람을 믿지 않거나 좋아하지 않는 습성이 생겨난 것 같다. 나중 얘기지만 고교졸업 후 일본에서 대학 공부할 때나 상해 생활에서 중국 사람을 만났을 때 그들에게선 인정 넘치는 좋은 경험만 가져 더욱 그런 것 같다.

정요한옹 남매 (누님과 평양 장대현교회 앞)

집에서 3년 이상 개인교습을 통해 조선말 등 언어에 차차 익숙해지면서 1932년 봄 숭실학교(중고교)에 무난히 입학했다. 이때는 한창 장난 심한 학생일 때였다. 시험 때 공부하기 싫어 친구들과 밤에 몰래 학교에 숨어들어 미리 시험지를 훔치려 시도한 일, 친구 도시락을 훔쳐 먹다 걸리는 일 등으로 1주일 정학 당하니 주변에서 무척 놀라워했다. 나는 ‘양같이 순한 아이’로만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고교 3년 때는 조선독립군 모집사건에 엉뚱하게 연루됐다. 중국에서 독립운동 관련 활동을 위해 숭실학교를 퇴교한 한 학생이 있었다. 그가 평양에 독립군 모병문제로 잠시 들렀다가 내 친구 2명과 함께 우연히 만난 적이 있는데 이것이 걸린 것이다. 결국 며칠 감옥에 갇혔다가 혐의가 없어 풀려나긴 했지만 이때 일본 헌병대에 있는 한 조선인에게 이유 없이 폭행을 당했다.
정작 일본 헌병대원은 조용히 질문하다가 혐의가 없어 풀어줬는데 이 조선인은 달랐다. 따로 불러 무조건 먼저 따귀부터 때리면서 솔직히 불라고 윽박질렀다. 한국이름이 김덕산이고, 일본명은 도꾸야마인 것을 기억한다. 나중 일이지만 해방 후 이 조선 헌병을 상해 거리에서 마주쳤다. 김덕산은 그때 일을 잘못했다고 비굴스럽게 빌어 그냥 용서하고 놓아주었다.

미국땅에서까지 싸우는 일부 동포

해방 후와 6·25전쟁시 나는 미국공무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직장이 일본에 있어 나는 가족들(5명)과 함께 일본에 20여년 거주했다. 그 시절 내가 경험한 일본인과 한국인에 대한 느낌은 사뭇 달랐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한국인에 대해 별 좋은 추억거리가 없다. 내 탓이지만 일생 절친한 한국인 친구 한명 제대로 사귀지 못했다. 한국 땅에서 8년 밖에 거주하지 못한 짧은 기간 탓으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은퇴 후 캐나다에 40년 이상 살지만 가까운 한국인 친구는 한 명도 없다.
아마 어릴 때 미국에서 겪은 한국 어른들끼리 서로 싸우는 부정적 영향인지 모른다. 또 미성년시절 평양 학교에서 같은 또래에게 돈을 뺏기며 성장한 마음상처 때문인지, 감옥소에서도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더 악랄하게 심문을 겪은 탓인지, 어쨌든 진실한 한국인 친구 한명 갖지 못한 것은 평생 내 자신의 불운이다.
고교 졸업 후 유학으로 일본 외국어대학(4년제)에 들어갔다. 외국어대학은 사립대학이 아닌 국립대로 입학이 무척 어려운 학교였다. 일본에 가자 곧 대학입시를 위해 다시 1년 간 일본어를 열심히 배웠다. 평양 숭실학교에서 배운 일본어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아예 처음부터 새로 일본어를 배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입시과목은 영어와 일본어로 약 7~8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했다. 고향 평양가족들은 내가 무난히 입학하니 그렇게들 좋아했다. (당시 일본 사립대는 와세다대학과 경응(慶應 게이오)대 등이 유명했다. 명치(明治)대, 중앙대는 비교적 쉽게 입학이 가능한 학교였다. 명치, 중앙대엔 부잣집 조선학생들이 많았다. 중간시험 때는 종종 영어 대리시험을 부탁받아 여러 번 타 학교에 가서 대리시험을 치러준 적이 있다.)
외국어대학에선 전공을 영어가 아닌 러시아어를 택했다. 반에는 정원 30명학생 중에 나만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대학 전체(4년제)로는 약 1천명 학생 수에서 조선인학생은 단 8명뿐이었다. 외국어대학이라 각 국가별 과(科)가 10개 있었다. 중국어, 인도어과 등도 있었으나 조선(한국)어과는 없었다. 이는 이미 조선 땅이 일본에 강제 합병된 때문일 것이다.
일본 친구들은 내가 조선인임에도 불구하고 4년 대학시절 중 단 한번 차별 당함없이 축구, 조정 등 서클활동 등으로 우애있게 지냈다. 나는 1년을 쉬었다가 5년간 대학을 다니다 평양으로 되돌아갔다. 당시 외국어대학을 나오면 외국기관 취직이 수월했다. 그러나 나는 조선으로 되돌아와 부친이 경영하는 평양자동차회사에서 일했다. 부친은 평양에서 자동차회사(부속판매 및 수리공장)를 운영하셨다.
한편 부친은 한국으로 귀향 후에도 도산과 교류를 계속 가졌다. 중3때인 1935년 도산이 대전감옥에서 나와 평양으로 부친을 찾아오셨다. 나를 보곤 “이제 쟈니(John)가 컸구나.” 하셨다. 도산은 내 머리 속엔 항상 학자 같은 조용한 분으로 각인돼 있다. 도산은 감옥 후유증 탓인지 오래 못 사시고 1938년 별세하셨다.
당시는 세계대전이 무르익던 모두 어렵던 시기였다. 1943년 내 나이 25살이 되면서 나는 부모가 소개해 준 한 평양 여성과 결혼했다. 현재까지 건강히 함께 있는 아내 장인선(구술 당시 87세)이다. 우린 한국의 최초 기독교산실이라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식을 올렸다. 당시 때가 전시(戰時)인지라 여행은 못가고 1주일은 우리 집, 다음 1주일은 처가집에서 신혼을 보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1944년 3월 징병을 피해 홀로 중국 상해로 갔다. 상해에선 학교동창인 백영선 비즈니스를 도왔다. 일본인이 아내인 백 사장은 스웨덴 회사로부터 구리를 구입해 일본군에게 공급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무역서류를 번역하고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서 구리사업체 또한 문을 닫고 백 사장은 홀연히 사라졌다.

도산 안창호 선생, 항상 조용한 분

해방이 됐어도 나는 곧 한국으로 떠날 수 없었다. 중국 정부는 일본군에게 구리 공급을 했다는 이유로 나를 감옥에 가두고 심문했다. 중국 측은 백영선 행방을 물었으나 알수가 없자 한 달 후 풀어줬다.
1946년 1월 중국에서 송환되는 배편을 이용해 부산에 닿았다. 혹시 나는 가족들이 이미 남한으로 내려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서울로 올라가 집안끼리 잘아는 장이욱박사(한때 평양 자동차공장 사장 역임)를 만나니 그가 평양 가족소식을 들려줬다. 장 박사는 “하루빨리 평양으로 올라가 식구들을 데리고 내려오라.”고 재촉했다. 38선이 완전 닫히기 전에 속히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12월 중순 38선을 넘다가 먼저 미군에 걸렸다.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잘 다녀오라며 안전한 루트를 알려 주었다. 그러나 얼어붙은 강가 부근에서 이번엔 소련군에게 붙잡혔다. 소련 병사는 고향 간다는 내 얘기를 묵살하고 무작정 기다리게 하더니, 그 뒤 나타난 북한군에게 인계해 황해도 해주감옥소에 가두었다.
여기 감옥에서도 한 달간 갇혀 있었다. 당시 난방시설도 전혀 없는 감옥이다. 이 해주감옥소에는 소위 반동분자라는 정치범들이 함께 섞여 있었다. 북한관리는 내 지난날을 하나하나 캐고 심문했다. 미국, 일본, 중국에서 그간 해온 일 등을 반복적으로 물었다. 심문 요점은 ‘내가 미국의 비밀밀령을 띤 첩자인가’를 확인하기 위함 같았다.
어느 날 하루 다른 북한간부가 지나치다가 심문받는 나를 보고 아는 체했다. 나는 그를 못알아 봤으나 그는 자신이 내 숭실학교 2년 후배라고 했다. 그는 ‘북한 정부에 전적으로 협력한다고 약속하면 풀어주겠다’고 해 서명하니 정식 여행증까지 만들어 주면서 다음날 석방시켰다.
그날 밤 트럭을 타고 평양 집에 갑자기 내 모습을 드러내자 온 집안 식구가 환호했다. 부모님은 좀 늙었지만 아내는 예전모습 그대로였다. 내가 상해 머무를 때 태어난 장남 로버트는 두살이 넘은 건강한 아이로 변해 있었다. 나는 두 달 이상 집에 머물며 가족들과 원산 등지를 여행했다. 원산(원래 함경남도/현재 북 강원도 수도)은 아내 친척이 살고 있는 도시로, 아내 역시 원산에서 원산여고(일본인 학교)를 나온 연고지였다.
1947년 4월 부모님은 일단 평양에 남겨둔 채 아내와 아들, 장모와 함께 4명이 먼저 남한행을 결정했다. 우리는 다른 그룹의 피난민들과 합류해 국경지리를 잘아는 전문 안내자를 고용, 밤중에 무사히 38선을 넘었다.
서울에 도착해서 우연히 미군부대에서 수위로 일하는 아버지 친구를 만났다. 그 아저씨가 어떻게 미군부대에서 일하게 됐는지 모르지만 그는 평양에선 식당을 운영하던 분이셨다. 그는 나를 미 육군보안부대에 소개해 통역으로 취직시켰다.
그때 한 한국 건설회사가 미군과 관련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 한국회사에선 무리한 요구로 나를 압박했다. ‘교제비를 얼마든 대줄테니 미군 담당에게 술 등을 사줘 잘구어 삶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받는 시멘트 1백 포대를 2백 포대로 서류 숫자만 살짝 고쳐 수령 받으라.”는 것이다. 그는 “미군들은 물품을 산더미같이 많이 갖고 있으니 1백 포대쯤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끈질기게 설득시키려 했다. 결국 고민 끝에 그 자리를 스스로 물러났다. 한국회사와 인연을 끊고는 다른 직종의 미군 통역 일을 찾았다. 사실 내게 직장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해방 후 당시는 우리 모두 춥고 가난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비록 고생되고 힘들었지만 가정에 딸 헬렌도 태어나 오순도순 잘살았다. 지금 회고하면 그때가 그래도 가장 행복한 시절 중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가진건 없었어도 젊음 하나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고 자신감이 넘쳐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정요한의 결혼식 (장대현교회)

당시 국적문제에 무관심

어느 날 한 미군장교로 인해 내 신분이 완전 달라지는 계기가 됐다. 미군부대 내에선 봉급을 미국인에겐 달러를, 한국인에겐 한국 돈으로 지불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미군장교가 나를 부르더니 “너는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 시민인데 왜 한국 돈을 받느냐”고 의아해 하는 것이다. 사실 그때 나는 국적문제는 전혀 관심 밖이었다.
그 장교는 나를 미 대사관으로 데리고 가서 즉시 미국인 신분으로 바꿔주었다. 1949년 1월부터 나는 정식 미국대사관 행정기관 멤버가 됐다. 명칭은 보조행정요원이다. 당시 미 공무원은 1급부터 12급까지 분류돼 있었다. 미 대사가 1급이고, 가장 낮은 급수인 12급이 타이피스트 직군이었다. 나는 가장 낮은 급수인 12급부터 시작했다. 대사관에서 정해준 그대로 따랐다. 불만이 있을리 없었다. 그래도 미국인 명부에 등록되니 봉급에서 많은 금액이 차이가 났다.
그때부터 나는 정식 미 공무원으로 대우받았다. 이때 새삼 느낀 것은 ‘단 한 번의 우연한 만남이라도 그것이 인생에 중요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서울에서 부산지부로 발령돼 6개월간 부산에 체류했다. 주말엔 자주 해운대에서 지냈는데 다시 서울 서빙고로 전직됐다. 집안에선 막내아들 데이빗이 태어나 자녀는 2남1녀가 됐다.
1950년 6월 25일. 아, 우리 민족에게 결코 잊지 못할 통한(痛恨)의 6·25. 주일(일요일)인 이날 교회에 참석했다가 북한 남침소식을 들었다. 집에 오니 즉시 사무실로 연락하라는 전화를 받았다.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남침 중으로 하루 이틀 내에 서울이 점령당할 것이라는 미 대사관 통보였다. 그날 지시대로 가족들을 인천에 보내고 나는 서울에 대기상태에 있었다. 아내와 애들은 다른 미 대사관 가족들과 함께 인천에서 일본 하카타로 보내졌다.
다음날 미 대사관에 나가 주요 서류들을 전부 없애고 피난 준비를 했다. 나를 포함해 대사관 직원들은 27일 아침 김포에서 맨몸 뿐으로 비행기를 타고 일본 규수공항을 거쳐 교토에서 가족들과 재결합했다. 미 정부는 교토 역전호텔에 숙소를 만들어 주었다. 전쟁이 장기화 조짐을 벌이자 요코하마 지역일이 할당됐다. 주말에는 교토 가족에게 갔다가 일요일 밤 다시 기차를 타고 요코하마로 돌아왔다. 결국 전쟁장기화로 미 대사관이 문을 닫으면서 나는 양자택일해야 했다. 일본소재 미 기관에 고용문제를 알아볼 것인가 또는 미국으로 돌아갈 것인가를.
다행히 일본 미군 G2에 통역으로 취직이 됐다. 거기엔 다른 한국인 통역도 10명 있었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대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북한 포로 서류 번역작업을 맡고 있었다. 나는 나카모 지역에 조그만 집을 사서 근무처인 도쿄 시내사무실로 출퇴근했다. 그럴 즈음 맥아더장군의 9·28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변화가 생겼다. 항상 한국의 남은 식구들을 걱정하던 아내는 애들을 데리고 그해 10월 하순 먼저 하네다공항에서 서울로 가는 첫 비행기에 올랐다.
서울이 수복되고 미 대사관이 다시 문을 열면서 예전 직원들을 재 모집했다. 나는 즉시 응모해 재고용됐다. 그런데 일본 주둔 미군 측에서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미군측은 갖은 회유와 은근한 협박으로 나를 붙잡았다. 하지만 가족들이 있는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나를 어찌 하겠는가.
마침내 미군 고용직에서 풀려나 11월 중순 서울로 떠났다. 서울에 도착해선 많은 슬픈 소식들을 접했다. 서울거리는 많이 파괴됐고 상당수 지인들이 살해됐거나 북으로 납치된 경우가 많았다. 같이 일하던 동료들도 일부 죽거나 실종됐다. 서울 도착한지 서너 주가 지난 후 나는 대사관에 한 주 휴가를 얻어 대사관 비행기로 평양에 갔다. 그간 평양에 계신 부모소식을 전혀 못들어 궁금했다.
평양에선 부모님과 누님 가족들이 곤경하에서도 모두 무사했다. 그러나 다음 날 평양에 임시 체류중인 미 부영사가 “중공군이 이미 국경을 넘고 쳐들어오는 중이니 빨리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가라”고 급히 전했다. 그날 밤으로 부영사가 운전하는 지프차로 대동강 다리를 넘어 미 비행기를 기다렸다. 운좋게 부모와 누님가족까지 모두 비행기에 태우고 서울로 떠났다. 놀란 것은 김포공항에 닿자 미 대사관 3/4톤 트럭이 대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트럭은 우리들을 싣고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미 시민 가족임을 배려해준 것이다.

전쟁통에 고생하는 동포들에게 미안

생각하면 그 무서운 전쟁 통에서 한국인들 모두 엄청난 고생을 겪고 있는 참에 나만 특별대우 받는 것 같아 조심스러웠다. 단지 미국 태생시민(자국민보호차원)이기 때문이겠지만 같은 민족으로서 고생하는 동포들에겐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1·4후퇴가 시작됐다. 중공군이 서울을 재점령하면서 미 대사관은 다시 부산사무소로 내려갔다. 서울점령 직전 가족들도 기차로 부산에 닿았다. 부산은 피난민으로 넘쳐 흘렀다. 방 얻기도 힘들었다. 미대사관기록에 따르면 그해 겨울 상당수의 피난민들이 집없이 방황하다 동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대사관이 대폭 고용인원을 줄이면서 나는 일본 도쿄사무소로 전근됐으나 곧 사무소 문이 닫혔다. 나는 도쿄 미 공군정보부에 새 직장을 잡았다. 직책은 역시 통·번역 업무였다. 미공군부대에선 2차 세계대전당시 소련이나 중국에 포로로 있다가 귀환한 일본군 통역업무를 내게 맡겼다.
나는 부산에 남은 가족을 일본으로 데려오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가족의 일본행 승인이 난 것은 그해 4월. 우리가족은 1959년 12월 시카고로 이주하기 전까지 8년간을 일본에서 살았다. 이 기간 중 내 자식들은 미국과 일본 두 나라 문화권을 배웠다. 나는 잠깐 미 공군부대를 사직하고 시카고로 일시 이주했다. 아내와 자식들을 위한 미 시민권 획득문제 해결을 위해서였다. 몇 개월 차질을 빚긴 했지만 모든 일이 계획한 대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1951년 일본에서 뷰익 GM차에 기댄 부인 장인선

미국 시민권이 해결되자 1960년 5월 일본으로 되돌아왔다. 우리는 시모키타자와, 센겐초 등지에 살았고 다시 미 공군정보부에 근무했다. 아이들이 일본에서 성장하며 일본고교를 각각 지난 1963년, 66년, 67년 졸업하자 우리 가족은 생활터전을 완전 미국으로 옮겼다.
장남 로버트가 미 마이애미 대학에 다니다가 잠깐 휴학할 때였다. 집안이 온통 소용돌이에 말려드는 일이 생겼다. 아들에게 베트남전쟁 입영 영장이 나온 것이다. 원래 반전주의자였던 아들은 곧 캐나다 몬트리올로 종적을 감췄고 미 정부당국은 군기피자인 아들을 찾아다녔다.
미 공군부대에서 일하는 나는 FBI나 상관으로부터 아들 은신처에 대해 자주 질문을 받았으나 행방을 알려줄 수가 없었다. 누가 자기자식을 전쟁터 입영을 기피했다고 거처를 신고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내 근무처는 미 국가정보기관이기에 그리 간단히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다행히 내 상관은 “내가 당신이라도 아들 있는 곳을 밝히지 않겠다.”며 위로했다. 나는 진정 고맙게 생각했지만 거듭 생각 끝에 직장을 사직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내도 동의했다.
사직서를 제출하니 평상시 내 근무태도를 좋게 평가하던 상관은 “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며칠 후 나를 부른 그는 “그럼 이렇게 하자. 이곳보다 정보수준이 낮은 단계의 새 신분으로 하와이에서 근무하면 어떠냐.”고 제의했다. 나는 이를 받아들여 1969년 6월 새 직책으로 발령돼 하와이 오아후로 옮겼다.
허지만 하와이에서도 미 FBI는 나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미 정부 에이전트를 통해 계속 전화하고 괴롭혔다. ‘당신 아들 있는 곳을 안대면 동네 주민들에게 아들이 정부에서 수배 중인 도망병임을 알리겠다.’고 협박했다. 또 내 상관에게도 연락해 “당신 부하 아들이 도망병이니 속히 찾아내라”고 촉구했다. 에이전트 전화는 단순한 공갈이 아니었다. 궁리 끝에 캐나다 이주를 결정해 직장 상관 추천서를 요청했는데 윗선에서 번번이 거절당했다.
크리스마스이브 때 일이다. 상관은 나를 “근무 후 그의 사무실에 들르라”고 불렀다. 성탄절 전날이라 근무가 일찍 끝나 낮 12시쯤 그를 방문하니 밖에서 기다리라는 것이다. 5시간 넘게 오랜시간 기다렸다. 상관은 오후 5시경에 나타나더니 “집에 가도 좋다”고 한마디만 던지는 것이 아닌가. 기분이 무척 나빴지만 고의로 골탕 먹인 그의 마음을 이해하기로 했다.
한편 아들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도 일을 제대로 못해 생활비 등 경제적 곤경에 처해 있었다. 신분노출 관계로 신분증 등 정당한 서류를 만들 수 없어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캐나다 연방경찰에 걸리면 금세 그의 신분이 탄로 날 것이었다. 결국 우리 부부는 아들을 돕는 한 방법으로 캐나다 이주를 결심했다. 부모가 캐나다 이민자이면 재정적 도움뿐 아니라 자식의 이민정착 해결도 쉬울 것으로 판단했다. 은퇴시기도 다가왔고 이젠 오랜 미 직장생활을 접을 때가 됐다. 아들 로버트 문제로 은퇴 일이 좀 당겨진 것 뿐이다. 나는 하와이에서 워싱턴DC로 다시 전근발령을 받았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간의 만 22년 미 직장생활을 접고 캐나다에서 새로운 이민자생활을 시작했다.

4개국 전전한 험난한 인생길

수년 후 아들 로버트에게 행운이 왔다. 카터 대통령이 베트남전쟁 미군 기피자들 전부에게 일체 사면령을 공포(公布)한 것이다. 이때 우리가 받은 기쁨의 메시지는 얼마나 컸던지. 일생 반가운 소식 중 하나였다. 아들은 곧 미국으로 달려가 사면을 받고 캐나다로 돌아와 새 삶을 시작했다.
내 캐나다 이민은 이미 은퇴 후 노년생활이라 드라마틱한 내용이 별로 없다. 42년 전 토론토에 첫 발을 디딜 때엔 건물이 많지 않았고 교포수도 적었다. 한국 음식점은 단 한 개도 없었고, 한인 상점 자체가 드물었던 시기였다. 그때는 한인들을 만나면 무조건 반가웠다. 교회는 한인들의 만남의 장소로 이용됐고 한인사회 구심점이 됐다. 캐나다 한인사회 터주대감은 서독 광부나 간호사들이 원조다. 캐나다 유학생들이 더러 있었지만 인원은 아주 적었다.
이때 가슴 아픈 사실 하나는 막내아들을 잃은 사건이다. 영화제작을 한다고 미 대륙을 동분서주하던 막내 데이빗이 결혼 후 40대 한창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자금부족으로 스트레스가 심하던 그는 영화계 주목도 못 받고 일찍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이제 우리 부부는 떨어져 사는 자식들과의 만남이 낙(樂)중의 하나가 됐다. 장남 로버트는 캐나다 BC주 빅토리아에, 딸 헬렌은 미시간에 살고 있다. 로버트는 거주지 바닷가(태평양)근처에서 서양레스토랑을 운영하며 자주 토론토에 온다. 비교적 거리가 가까운 딸 헬렌도 가끔 차 운전으로 우리를 방문한다. 국경을 넘어 차 운전이 편도 10시간이 넘는 거리지만 아무런 불평이 없다. 로버트 경우 비행기로 5시간이 더 걸리나 바쁜 비즈니스를 아랑곳 않고 달려온다.
남을 존중하면 자신도 대접받는다
생각하면 내 인생길은 험난한 시대를 헤치며 4개 나라를 전전하며 살아왔다. 다행히 오늘까지 무난한 삶을 누리도록 돌봐준 하나님께 늘 감사하는 마음이다. 또 어릴 때부터 영어, 일본어, 한국어를 익히다보니 한평생 언어와 함께 걸어온 삶의 여정이었다.
이제 나이 94살. 햇수를 헤아려 보니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22년, 한국 8년, 일본 22년, 마지막 캐나다에서 42년 세월을 살고 있다. 캐나다는 미 은퇴 후부터 황혼기였다. 마지막 캐나다를 선택한 원인은 장남 때문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잘내린 결정이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복지국가인 캐나다에서 이렇게 걱정없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는 사실, 이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나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니는 기독교신자지만, 젊은 시절엔 술도 많이 마시고, 음악을 즐기며 잘 놀기도 했다. 음식은 지금도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 몸에도 무슨 고장이 없다. 다만 성격이 비사교적이어서 사람들과 가까운 친분관계가 별로 없을 뿐이다. 그리고 누구도 마찬가지겠지만 거짓을 싫어한다. 이 글도 절대 미화, 과장되거나 허위가 되어선 안 된다.
혹자는 가끔 내게 장수한 비결을 묻는다. 그것은 아마 하나님에게 자신을 맡기고 별 스트레스 없이 살아와 그럴 거라고 답한다. 교만하지 말고 자신을 낮추고 남을 존중하면 자신도 대접받는다.
세월은 흐르고 밖에는 노래진 낙엽 아래 아, 벌써 소슬바람이 불어오고 있구나.

(구술기록 : 송광호 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