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의 수난사를 보았다

유라시아 특급 타고 7박8일 시베리아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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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好俊
전 신문발전위원회 위원장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 저서 : ‌유라시아 고려인-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 150년

시베리아 횡단 철도

꿈에 그리던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탔다. ‘유라시아 친선특급 2015’에 특별초청인사로 선정되면서 잡은 기회다. 고려인 역사를 연구하면서 시베리아횡단철도는 꼭 한번 타봐야겠다고 벼르던 참이었다. 그 철로를 따라 전개된 고려인의 이주, 개척, 투쟁, 강제이주 등 아픈 역사의 현장을 보고 싶었다.
유라시아 친선특급은 정부가 광복 70년을 맞아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구상과 통일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마련한 이벤트였다. 행사는 지난 7월14일 서울을 출발해 8월2일 베를린에서 행사를 마치고 귀국하는 19박 20일, 장장 1만 4,400㎞의 대장정이다. 나는 그 중 제1구간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4,127㎞를 갔다.
시베리아 철도는 1891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3세에 의해 착공되어 25년 만인 1916년에 완공되었다. 이 철도의 개통으로 지구 최대의 자원보고인 시베리아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철로 변에 인구유입이 촉진되면서 잇따라 대도시가 건설되었다. 당시 고려인들은 ‘질등일꾼’으로 철도건설장을 돌며 품삯을 벌었고, 공사 청부나 물품 납부를 맡은 ‘포드랴치크’가 되어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고려인의 개척의 길

시베리아 철도는 100여 년 전부터 고려인들이 남부여대해서 달려간 이주의 길, 개척의 길이다. 또한 1937년 고려인 18만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유배(流配)의 길이다. 그때 원동에서 70여 년 간 민족공동체를 영위하다 추방된 고려인들에게 이 길은 통곡의 길이었다.
이번 대장정의 출발지인 항구도시 블라디보스토크는 시베리아 철도의 동쪽 종착역이자 시발역이다. 러시아어로 동쪽을 정복하라는 뜻인 블라디보스토크는 지난 150년 간 고려인의 삶을 지켜본 역사의 현장이다. 20세기 초 블라디보스토크는 고려인의 치열한 조국해방투쟁 기지였다. 러시아지역의 항일독립운동을 대표하는 권업회, 한인신보사, 대한광복군정부, 대한국민의회 등이 이곳 고려인 거주 지역인 신한촌에 자리하고 있었다. 안중근, 최재형, 이상설, 이동휘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똬리를 틀고 활동하였다. 고려인은 신한촌에 들러야 조국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연해주와 만주의 무장유격대는 신한촌에 와야 무기와 탄약을 구할 수 있었다. 신한촌은 작은 독립국처럼 행세했다. 청년들은 일본인의 신한촌 출입을 폭력으로 저지하고 친일분자 색출작업을 벌여 여러 명의 밀정을 바다에 수장했다. 1918년 4월 일본 침략군이 상륙하자 고려인들은 일본군함 앞에서 반일시위를 벌이는 대담함을 과시했다. 또 시찰 나온 일본 총영사가 고려인 학교에 200루블을 기증하자 한 여교사는 그 돈을 찢어 불속에 던져버리기도 했다. 3·1운동 후 민족운동의 메카가 된 신한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소재지를 놓고 상해와 경쟁하기도 했다

신한촌 참변 – 이상설 유허비와 최재형 고택을 찾다

고려인이 겪은 첫 참변은 1920년 4월5일 신한촌에서 일어났다. 원동주둔 일본군이 적위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면서 고려인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작전을 병행한 것이다. 이때 일제에 의해 살상된 러시아 혁명세력과 고려인은 7,000여 명에 달했다. 이것이 ‘4월참변’이다. 일본군은 신한촌을 포위한 뒤 모든 집에 대해 가택수색을 실시하고 무차별 사격을 가해 고려인을 학살했다. 무고한 시민을 학교에 가두고 방화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일본군은 고려인들의 시신을 녹슨 레일에 매달아 바다에 내던졌다. 체포된 러시아혁명군 지도자 세르게이 라조는 기관차 화통에서 산 채로 화장되었다. 신한촌에 일본군 헌병초소가 설치되면서 민족운동의 중심지 신한촌의 역할은 무너졌다. 수많은 독립투사가 지하로 숨어들었다. 일제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조선총독부 관리를 주재시켜 고려인을 식민지 조선인처럼 ‘천황의 신민’으로 간주해 통제했다. 또 점령지에 친일 어용조직을 만들어 고려인 사회를 분열시키며 민족운동에 심대한 악영향을 조성했다.
지금 블라디보스토크에 신한촌은 없다. 강제이주로 고려인 주민이 모두 중앙아시아로 떠난 후 신한촌은 러시아인 마을로 변해 지도에서 사라졌다. 과거 신한촌이 자리했던 언덕엔 지금 ‘신한촌기념탑’만 외로이 서 있다. 1999년 3·1운동 80주년을 맞아 건립된 탑이다.
대장정 참가단은 지난 7월15일 블라디보스토크 북쪽 110㎞에 있는 우수리스크에서 ‘헤이그 특사’ 이상설 유허비와 ‘연해주 항일운동의 대부’ 최재형의 고택을 찾았다. 우수리스크는 연해주 최대의 고려인 집거지로 2만 여 명이 살고 있다. 이상설은 1907년 고종 황제로부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일본의 침략행위를 고발하라는 밀명을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탔다. 일제의 방해로 회의 참석이 좌절되자 이준은 현지에서 분사(憤死)했고 이상설은 일제의 강압으로 조선에서 열린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자 러시아로 망명했다. 이상설은 연해주에서 반일단체 성명회를 조직하고 연해주·북간도 일대의 의병을 규합해 군대를 편성하는 등 국권회복운동에 헌신하다 1917년 47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그는 “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고혼(孤魂)인들 어찌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을 모두 불태워 그 재를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서릿발 같은 유언을 남겼다. 고인의 유해는 동지들에 의해 수이푼 강가에서 화장되고 재는 강물에 뿌려졌다. 수이푼 강은 동해로 흘러들어가는 강이니, 그의 고혼도 강물 따라 흘러가 조국에 닿았으리라.
선생을 위한 진혼제는 수이푼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유허비에서 엄수되었다. 3명의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헌화를 하고 판소리 명창 서명희가 ‘당신의 노력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창을 했다. 그동안 몰랐던 아픈 역사의 현장에서 젊은이들의 흐느낌이 물결쳤다. 유허비를 바라보는 나의 허전한 마음에도 찬바람이 스쳐갔다.
진혼제를 마친 대표단은 우수리스크 블로다르스카야 거리에 있는 최재형의 고택으로 이동했다. 그는 1920년 ‘4월참변’ 때 이 집에서 일본헌병에게 끌려 나가 총살당했다. 그의 기백이 서린 이 고택은 옛 부호의 집답게 멋을 부린 견고하고 아담한 단층집이지만 너무 낡아 보수가 시급해 보였다. 건물 전면에는 태극기와 러시아기를 나란히 새긴 금속 현판이 붙어있다. 한·러수교 20주년을 기념해 한·러 정부가가 공동으로 세운 것이다. 건물 안에는 네 방의 중심에 페치카가 있고, 사방의 벽은 강추위를 이길 수 있도록 두께가 1m나 돼 눈길을 끌었다. 뒷마당엔 잡초가 무성했다. 러시아인 가정집으로 쓰이던 이 고택은 최근 고려인문화센터가 매입해 기념관으로 개관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1869년 부모를 따라 연해주로 이주한 최재형은 러시아에 귀화해 도헌(都憲·면장)을 지내고 자산가로 성장해 고려인 사회를 이끈 대표적인 지도자다. 그는 쇠고기 군납 등으로 연간 10만~15만 루블을 벌었다고 한다. 당시 노동자 월급이 10~15루블에 불과했으니 엄청난 소득이 아닐 수 없다. 그는 거금의 사재를 항일독립투쟁에 아낌없이 사용했다. 연해주 의병조직인 동의회 총재로, 민족 언론 대동공보와 대양보의 사장으로 활약하며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거사를 후원했다. 또 동포들의 권익을 위해 권업회 총재 등 주요 단체의 책임자로 활약했다. 그는 3·1운동 후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최재형의 자녀 11명도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볼셰비키 당원인 장남 표트르는 1919년 붉은 혁명의 와중에 서시베리아에서 전사했고, 나머지 자녀들은 스탈린의 ‘피의 숙청시대’에 큰 고초를 겪었다. 발틱함대 포병장 출신인 차남 파벨은 일본간첩이라는 혐의로 1938년 처형당했다. 3녀 류보비는 국가은행 회계원으로 일하다 체포되어 총살되었고, 엔지니어인 5녀 올가와 농업기사였던 3남 발렌틴도 옥고를 치렀다. 또 최재형의 사위 7명 가운데 4명이 총살을 당하고 1명이 옥살이를 했다. 키르기스공화국 보건부 장관으로 재직하다가 처형된 쇼루코프는 넷째 딸 소피아의 남편이었다. 내가 2004년 여름 키르기스스탄 카라콜에서 만난 6녀 루드밀라만 비교적 순탄한 생애를 보냈다.
대장정 참가단의 우수리스크 순례는 나름대로 울림이 컸다. 참가자들은 최재형 이상설 같은 선열들이 앞장서 투쟁하며 목숨을 바쳤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머리를 숙였다. 두 분은 국내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어서 그동안 이 유적을 찾은 이는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최근 두 분의 생애가 조국에 알려지고 연해주 관광코스에 우수리스크가 포함되면서 이곳 아픈 역사의 현장을 찾는 한국인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이제 후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을 것이기에 두 분은 결코 외롭지 않으리라.

고려인 강제이주는 스탈린의 국가테러리즘

대장정 출정식은 9월15일 저녁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에서 열렸다. 철로 한복판에 세워진 이정표에는 모스크바까지 거리를 ‘9,288(㎞)’로 새겨 놓았다. 나는 갑자기 타임머신을 탄 듯 78년 전 과거로 돌아갔다. 역사의 그날, 그러니까 ‘일본스파이’ 고려인을 태운 첫 열차가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1937년 9월9일 밤. 역에서 군인과 특무요원들이 고려인을 포위하고 “빨리 기차에 타라”고 소리친다. 70여 년을 산 고향에서 쫓겨나면서도 누구 하나 안 가겠다고 떼를 쓰는 사람이 없었다. 양떼처럼 온순하게 말없이 기차에 올랐지만 속으로는 모두 울고 있었다. 당국은 단 1명의 이탈도 허용치 않았다. 병원에 입원 중인 사람은 퇴원시켜 승차시켰다. 기관에 근무하거나 군에 복무 중인 사람은 해임 또는 제대시켜 이주열차에 오르게 했다. 훗날 고려인 화가 안일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어둠 속에 가축처럼 실려 가는 고려인들은 마치 아우슈비츠의 가스실로 끌러 가는 유대인 같았다”고 회상했다.
고려인 강제이주는 소련 국가테러리즘의 극치였다. 이주에 앞서 소련은 사전 정지작업으로 고려인 지도층 2,500명을 체포, 구금했다. 이들은 일본의 지령을 받고 소련에서 연해주를 떼어내려는 반소(反蘇)폭동을 준비했다는 혐의로 대부분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되었다. 강제이주 후 도착지 중앙아시아에서도 고려인에 대한 탄압과 처형은 계속 되었다. 또한 많은 사람이 굶어 죽고 질병으로 쓰러졌다. 1937~39년까지 3년간 강제이주로 인한 고려인의 정치적 사회적 희생자는 총 1만 6,500명으로 추정되었다. 고려인 강제이주는 해외 한인이 겪은 아픔 가운데 가장 큰 상처이며 결코 지울 수 없는 통한의 역사다.
대장정 참가자를 태운 러시아 열차는 15일 오후 9시30분 블라디보스토크 역을 떠나 하바롭스크를 향해 달렸다. 육중한 기관차에 침대차, 식당차 등 10여 량을 연결한 열차는 시속 80~90㎞로 달렸다. 열차 내 침상은 길이와 폭이 짧고 좁아, 키 170㎝ 성인이 누우면 꽉 찰 정도였다. 체구가 큰 러시아 사람들은 어떻게 누워 가는지 궁금했다. 복도 끝에 온수탱크가 설치돼 컵라면을 먹거나 차를 마실 수 있게 뜨거운 물이 나왔다. 화장실은 아주 비좁았고, 세면대에선 수도꼭지 아래에 달린 코크를 위로 밀어야 물이 졸졸 나왔다. 열차 내 첫 밤은 편안했다. 기차가 밤새 덜컹거리며 온몸을 마사지해줘 쉽게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하바롭스크 – 형무소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지 13시간만인 16일 오전 10시 러시아 원동지방의 중심지 하바롭스크에 도착했다. 스탈린 시기 이곳은 원동 최초의 본격적인 한글신문 ‘선봉’이 발행된 곳이다. 선봉은 매주 1~2회 발간되었다. 30루블 이상의 수입이 있는 주민은 의무적으로 선봉을 구독하도록 독려 받았다. 1923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된 선봉은 1929년 발행지를 하바롭스크로 옮긴 후 강제이주 직전까지 8년간 이곳에서 발간했다. 강제이주 후 선봉은 ‘레닌기치’로, 소련붕괴 후엔 ‘고려일보’로 각각 제호를 바꾸어 가며 지금까지 피와 눈물로 모국어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고 있다.
고려인이 하바롭스크 개척에 첫발을 내딛은 건 1871년 여름. 두만강 건너 지신허에 처음 정착한지 8년만이다. 동시베리아 총독 시넬니코프는 국경지대에 몰려 사는 고려인들이 안보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고려인을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으로 분산 이주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포시예트 지역 고려인 362명이 2,000리 북쪽 하바롭스크의 사마르카 강변으로 이주했다. 이들은 한눈에 천리가 내다보이는 넓고 비옥한 평야에 아무르 강 최초의 고려인 정착촌 ‘사만리(沙滿里)’를 건설했다. 사만리는 자주 중국 마적의 습격을 받아 높이 2m의 토벽을 쌓고 방비했다. 이주민들은 러시아정교로 개종, 귀화해 러시아인과 마찬가지로 가구당 100데샤티나(33만평)의 땅을 분배 받았다. 후일 사만리는 러시아인 부촌과 다름없는 유족한 마을로 성장해 토지 없는 고려인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고려인의 사만리 이주는 고려인을 국경지방에서 쫓아내 내륙에 가두려고 한 러시아 정책이 일찍부터 성안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 정책을 전면적으로 밀어붙인 것이 1937년의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다.
이곳에서 문뜩 떠오른 건 스탈린 시절의 하바롭스크 형무소였다. 고려인 수감자가 많았던 이곳 형무소는 마치 도축장 같은 기계적 처형으로 악명 높았다. 소련공산당 포시예트지구 제1서기 김 아파나시는 1936년 1월 일본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스탈린에게 항의 전문을 보내 군사검찰국의 기소내용을 반박했다. 모스크바 중앙의 지시에 따라 그는 다시 재판을 받았다. 그의 죄목은 당초의 ‘일본간첩’에서 ‘혁명운동을 방해한 분파활동’으로 바뀌어 3년 유배형이 선고 되었다. 김 아파나시는 강제이주가 시작된 1937년 10월 유배지 우파에서 다시 경찰에 체포돼 하바롭스크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그에 대한 비밀재판은 1938년 5월25일 밤 10시15분에 시작돼 15분 만에 끝났다. 뒤이어 열린 소련공산당 원동지역 대표 김 미하일에 대한 재판도 15분 만에 끝났다. 두 사람 모두 일본간첩이란 날조된 죄목으로 사형 언도를 받았다. 총살은 당일 밤에 즉각 집행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의 레닌’으로 불리던 고려인 사회의 기대주 김 아파나시는 38세의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소련과 연해주고려인을 위해 헌신했던 두 사람이 반역죄로 처형됐다는 것은 기가 막힐 일이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소련으로 망명해 고려문학을 일으킨 작가 조명희 역시 간첩혐의로 체포되어 이 형무소에서 재판도 없이 총살당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일제에 짓밟혀 찾아간 희망의 땅 소련이었지만 조명희는 결국 붉은 독재자 스탈린에게 짓밟히고 말았다. 스탈린은 간첩을 처형한 것이 아니라 고려인의 민족의식을 처형했다.
하바롭스크는 아무르 강변에 건설된 아름다운 도시다. 블라디보스토크보다 러시아풍이 완연하다. 황금색 돔 지붕의 러시아정교회 성당, 고풍스런 건물, 숲이 우거진 언덕, 공원의 멋진 산책로가 마음을 잡는다. 거기에 도도하게 흐르는 아무르 강의 검은 물결이 위엄을 더한다.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을 흐르는 이 강을 중국인들은 ‘흑룡강(黑龍江)’이라고 부른다. 강물이 검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란다.
시베리아 내전에서 적위군과 백위군은 하바롭스크를 둘러싸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겨울에 군대는 말이 끄는 대형 썰매를 타고 이동했다. 철교가 끊어진 아무르 강에선 꽁꽁 언 얼음 위에 레일을 깔고 기차가 다녔다. 얼음이 꺼져 기차가 강에 빠지는 참사가 빚어지기도 했졌다. 그 전쟁의 한복판에 고려인 여걸 김 알렉산드라가 있었다. 그녀는 일찍이 고려인과 중국인 노동자 속에 뛰어들어 소비에트정권 수립을 위해 투쟁한 혁명가다. 또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정당인 한인사회당 결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고려인 최초의 볼셰비키 당원이자 원동인민위원회 외무위원인 김 알렉산드라는 1918년 9월 적의 공격을 받고 피신하던 중 백위군에게 붙잡혀 총살당했다. 그녀는 아무르 강 절벽의 형장에서 “나는 공산주의자이지 민족주의자가 아니다”라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다. 총성이 울리고 그녀가 죽음의 계곡으로 떨어지자, 이 33세의 꽃다운 ‘열녀’를 안은 아무르 강은 성난 파도처럼 포효했다.
원동의 적위파 정권이 붕괴된 후 고려인들은 소비에트 러시아를 지키자며 총을 들고 나섰다. 시베리아 내전 5년간 고려인이 조직한 빨치산부대는 47개, 참여한 인원은 1만여 명, 사망자는 민간인을 포함해 2,000여 명에 달했다. 적위군과 연대한 고려인 빨치산부대의 영웅담은 지금도 전설처럼 내려온다. 1921년 12월 고려의용군 제3중대는 이만 역의 철도와 교량을 지키다가 백위군과 일본군에게 포위되었다. 중대장 한운용은 6시간 동안 백병전을 벌이며 버티다가 적의 기병대에게 짓밟히고 말았다. 대원 51명 중 한운용을 포함한 49명이 장렬히 전사했다. 생존자는 두 명뿐, 소대장 최계립과 마춘걸은 온몸에 총상과 자상을 입고 실신해 있던 것을 다음날 고려인 동포들이 발견해 극적으로 목숨을 구했다. 고려의용군은 이준 열사의 아들 이용이 지휘했고 제1중대장은 만주에서 넘어온 임표, 제2중대장은 중국 귀주 강무학교 출신 김홍일이었다.
1922년 2월 볼로차예프카 전투에서 임표와 최계립이 지휘한 고려의용군은 과감한 적진 돌파로 승리를 견인했다. 여섯 겹의 철망이 쳐진 백위군 보루를 맨 먼저 제압한 부대는 고려의용군이었다. 적의 장갑차가 토해내는 폭풍 같은 기관총 화염 앞에서 그들은 철조망에 매달린 채 전사했다. 고려인들은 철조망 절단도구가 없어 총신이나 몸으로 철조망을 끊고 최후의 돌격을 감행해 적의 보루를 격파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적위군은 하바롭스크를 탈환할 수 있었고, 이후 백위군의 패망이 시작되었다. 하바롭스크 수복 후 적위군은 고려의용군을 정규군으로 승격시키고 이용을 대대장에, 후방 500리 수비대장에 김홍일을 각각 임명했다. 그런데 일부 대원이 중대장을 감금한 뒤 중국으로 탈주한 사건이 벌어져 수비대는 해산되고 김홍일은 러시아를 떠났다. 후일 중국에서 윤봉길 의사에게 폭탄을 제공하고 해방 후 제3공화국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한 김홍일이 바로 이 사람이다.

아름다운 이르쿠츠크에서 벌어진 자유시 참변

열차는 7월16일 밤 하바롭스크를 출발해 이르쿠츠크까지 3,340㎞를 3박4일간 달렸다. 열차는 4~6시간을 달린 뒤 간이역에 멈춰 20~30분씩 쉬었다. 열차에 샤워 시설이 없어 씻지 못하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 식사는 기본적으로 양식이었다. 감자, 돼지고기 등 메인요리와 샐러드가 각각 한 접시씩 담겨 나왔다. 양은 넉넉했는데 맛은 그저 그랬다. 열차 내 세미나는 러시아 음식문화에 관한 것이 재밌고 유익했다. 술이 떨어져 승무원에게 술이 없냐고 묻자 구석진 창고에서 보드카를 내줬다. 한 병에 1천 루블, 시중보다 3~4배나 비싼 값을 요구했다.
선로 옆은 각양각색의 야생화 천지였다. 철길을 따라 자작나무·소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졌다. 이 숲은 시베리아 벌판에 몰아치는 눈폭풍에서 철도를 보호하기 위해 조성한 방풍림 같았다. 그런데 방풍림이 승객의 시야를 차단해 방풍림 너머의 시베리아 속살을 볼 수 없었던 게 아쉬웠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시베리아 철도여행은 방풍림만 쳐다보고 달린 지루한 여행이었다. 방풍림은 러시아의 폐쇄성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방풍림이 끊어져야 시야가 트이면서 벌판이 나타났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허허벌판이었다. 한참 가다 보면 농촌이 나타났다. 농가는 허름했다. 거의가 녹슨 양철지붕에 판자로 지은 낡은 집이다. 농촌은 윤기가 흐르지 않고 활기도 없어 보였다.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의 모습은 좀처럼 보기가 힘들었다. 트랙터, 콤바인 같은 농기계가 바쁘게 움직이거나 말, 소, 양 등 가축이 초원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모습도 거의 볼 수 없었다. 러시아 농가는 가난하게 보였다. 인가가 수십 수백㎞ 떨어져 있으니 농사를 지은들 누구한테 그걸 팔 수 있겠는가. 농촌의 가난은 러시아의 너무 넓은 영토가 만든 산물이라면 역설일까? 대평원이 이어지다 바이칼 호수가 나타나기를 몇 번 거듭했다. 풍광이 아름다웠다. 드디어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시계는 19일 오전 11시를 가리켰다.
이르쿠츠크는 ‘동양의 파리’라고 부를 만큼 아름다운 도시다. 건물마다 색깔이 아름답고 문양이 기괴할 정도로 독특하고 다양했다. 샤만의 고향이라는 바이칼 호를 끼고 있어 신비감까지 드는 곳이다. 이르쿠츠크에는 고려인 2,000명이 살고 있다.
제정러시아의 시베리아 경략 거점이던 이르쿠츠크는 1826년 데카브리스트(12월혁명당원) 80여 명이 유배를 오면서 자유주의 사상의 요람이 되었다. 데카브리스트는 1825년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농노제 폐지와 입헌정치의 실현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실패한 청년 장교들을 총칭하는 말로 개혁과 혁명의 상징이다.
1920년대 초, 적위군이 점령한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 볼셰비키 세력의 중심지가 되어 각지의 고려인 운동세력이 모여들었다. 집결한 고려인 군대만 2개 대대 600여 명에 달했다. 이르쿠츠크는 고려인 공산주의운동의 정치적 군사적 중심지로 떠올랐다. 마침내 1921년 5월4일 이르쿠츠크 인민회관 대강당에서 고려공산당 창당대회가 열렸다. 한국현대사상 최초의 공산당이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2주일 후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서 당명이 똑같은 또 하나의 고려공산당이 창당된다. 전자가 러시아공산당 시베리아국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출범한 것이라면 후자는 이동휘의 한인사회당 세력을 뿌리로 결성된 것이다. 이후 두 고려공산당은 조선혁명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이다 급기야 자유시사건이 터졌다.
자유시사건이란 1921년 6월 28일 아무르주 자유시(현재의 스바보드늬)에서 벌어진 동족상잔의 참변을 말한다.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군대가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상해파 군대를 무장 해제시키는 과정에서 수백 명의 독립군을 살상한 것이다. 당시 자유시 인근에는 일제의 ‘훈춘대학살’을 피해 만주에서 넘어온 독립군 3,500명이 머물고 있었다. 러시아공산당은 이 독립군과 고려인 빨치산부대를 통합한 단일 지휘체계의 대규모 고려인군단을 창설키로 했다. 그러나 상해파가 통합을 거부하자 이르쿠츠크파는 러시아군과 오하묵의 자유대대를 동원해 상해파 군대에 대한 무장해제에 나섰다. 전투가 벌어졌지만 장갑차, 대포, 기관총 등으로 중무장한 이르쿠츠크파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소총 밖에 없었던 상해파는 400여 명이 전사 또는 익사하고 러시아군에 포로로 넘겨진 인원이 917명에 달했다. 자유시사건 후 이르쿠츠크파는 동족상잔의 추악한 범죄자로 지탄 받았고, “모자(毛子·러시아인)를 죽이라”는 반러 감정이 크게 일었다.
강제이주 전 원동의 고려인 역사를 되돌아보니 참담한 수난사뿐이다. 차르와 천황 사이의 틈바귀에서, 공산제국 소련과 군국주의 일본 사이에서 이리 차이고 저리 짓밟힌 것이 나라 없는 백성 고려인이었다. 망국이 낳은 기민(棄民)의 아픈 역사, 그것이 고려인의 역사였다. 역사에 가정(假定)은 없다지만 그래도 외치고 싶다. 그때 조국이 있었다면 고려인이 이런 모진 수난을 겪었겠는가? 망국의 역사를 잊지 말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2015년 7월 21일 귀국 비행기 편에서 수없이 되뇐 역사의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