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沿海州)는 고려인의 고향

- 재외동포 이민 성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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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好俊
전 신문발전위원회 위원장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 저서 : ‌유라시아 고려인-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 150년

민족의 고토, 영광과 회한 배인 곳

연해주는 유라시아 대륙에 흩어져 살고 있는 ‘현대판 디아스포라’ 고려인들의 역사적 고향이다. 러시아 땅 연해주는 조선왕조 말, 가난 때문에 한반도를 떠난 고려인들의 역외(域外)개척의 현장이자 조국독립운동의 피어린 무대였다.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청소정책’으로 그들이 눈물을 흘리며 중앙아시아로 떠난 출발지가 연해주다. 지금도 구소련 지역 내의 많은 고려인들이 고단한 삶을 추스르고자 마지막 한 가닥 희망을 안고 다시 모여들고 있는 ‘마음의 고향’이 바로 연해주다.
연해주는 우리와 아주 특별한 연관이 있는 지역이다. 한반도와 접경해 있다는 지리적 조건 이외에 역사적으로 우리 한민족의 영광과 회한이 배어 있는 곳이다. 그 옛날 고조선 시대부터 연해주는 우리 한민족의 생활권이었다. 우리 선조의 하나인 부여(夫餘), 북옥저(北沃沮)족이 거주한 지역이었으며, 그 후 고구려와 발해의 지배하에 장기간 우리 민족문화가 꽃을 피운 영역이다. 그러나 서기 926년 발해 멸망을 끝으로 연해주는 우리 민족의 손에서 벗어나 잊힌 땅이 되었다.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한족(漢族), 만주족, 러시아인 등으로 지배자가 바뀌면서 우리에겐 ‘고토(故土)’로서의 의미만 지니게 된 것이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한 현재의 한·러 국경선은 조선 세종 때 두만강 연안에 육진(六鎭), 압록강 유역에 사군(四郡)을 설치하면서 정해진 것이다. 연해주 최남단에 위치한 크라스노예셀로는 조선의 옛 영토인 녹둔도(鹿屯島)다. 육진 개척 때 군사를 주둔시켰던 면적 35㎢의 작은 섬이다. 1587년 이순신 장군이 조산만호(造山萬戶)로 가서 여진을 토벌하고 둔전제를 실시하다가 적의 공격으로 군사 11명이 전사하고 군민 160여 명이 끌려가자 백의종군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그 후 두만강의 퇴적작용으로 모래가 쌓여 연해주와 연결된 녹둔도는 1860년 청·러 베이징조약에 의해 러시아 땅이 되었다. 녹둔도는 언젠가 우리가 되찾아야 할 우리 고유의 영토다.
조선인들의 연해주 왕래는 19세기 초부터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다. 베이징조약으로 연해주의 주인이 청나라에서 러시아로 바뀌기 훨씬 전이다. 당시 함경도 거주 조선인들은 봄이면 몰래 국경을 넘어가 농사를 짓고 가을 추수 후에 귀향하곤 했다. 바다에서는 배를 타고 나가 고기잡이를 하다가 배가 파손되면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에서 수리하고 돌아왔다. 1811년 ‘홍경래 난’ 직후에는 두만강 건너 박석골, 감자밭골 등에 거주했다고도 한다.

1863년 정착, 연해주 개척 선도

한민족사에서 고려인은 독보적인 존재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최초로 ‘북상(北上)개척’을 선도한, 다시 말해 한반도 이북 대륙진출의 선구자가 고려인이다. 고구려·발해 멸망 이후 비좁은 한반도에 갇혀 살던 한민족의 지평을 저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으로 넓힌 주역이 바로 고려인이다.
고려인의 연해주 이주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제국주의 시대인 1863년에 시작되었다. 그때 조선의 기근과 봉건적 탐학에서 벗어나기 위해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몰래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의 지신허로 이주, 정착했다. 경흥출신 최운보(崔運寶)와 무산출신 양응범(梁應範)이 이끈 고려인 선조들의 자발적인 연해주 이주는 한국 근현대사 최초의 국외 진출이다. 1902년 12월 사탕수수 농장의 계약노동자로 태평양을 건넌 하와이 이민보다 39년이나 앞선 행보다. 이 고려인 이주민 13가구 60여 명은 지금 지구촌 곳곳에 똬리를 튼 700만 재외동포의 원조(元祖)이기도 하다.
연해주 개척은 조선 후기 이래 한반도에서 이주해간 조선인, 즉 고려인이 선도했다. 고려인들은 연해주의 삼림을 벌목하고 처녀지를 개간해 옥토로 바꾸었다. 뿐만 아니라 식량 증산에 필요한 농업기술과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하여 연해주 개발에 크게 기여했다. 당시 연해주의 ‘새 주인’ 러시아 군민(軍民)은 고려인이 생산한 곡물과 조선에서 들여온 생우(生牛)로 식량문제를 해결했다. 러시아인 지주들은 소유지 경작에, 러시아 당국은 교통·통신 건설과 군수물자 수송에 각기 고려인 노동력을 광범위하게 이용했다. 특히 블라디보스토크 항구건설, 우수리 철도공사, 포시예트 탄광, 라즈돌노예 벌목장 등은 고려인 인부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연해주 남부에 850여㎞의 도로도 고려인에 의해 건설되었다. 실로 고려인은 연해주 지역 최초의 개척자였다. 이후 고려인은 시베리아 철도를 따라 서진(西進)을 계속해 한반도에서 1만 수천㎞ 떨어진 동부유럽의 우크라이나, 흑해연안, 카프카스 지역까지 뻗어나갔다.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과는 전혀 교류가 없던 지역까지 고려인이 진출한 것은 한민족의 생활영역 확장에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최초 망명정부에 신한촌 참변도

구한말과 일제 강점시기 고려인들은 구국의병활동의 선봉에 섰다. 그들의 ‘아성(牙城)’ 연해주는 만주 간도와 함께 해외구국항쟁의 본거지였다. 특히 1905년부터 1919년까지 국내외의 모든 독립운동은 거의 연해주 고려인이 주도했다. 조선강점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안중근 의사를 비롯하여 항일무장투쟁의 영웅 홍범도, 연해주지역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의병 수천 명을 이끈 간도관리사 이범윤, 헤이그 밀사 이상설·이위종, 권업회 결성의 주역 이종호,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동녕, 대한제국 무장(武將)출신의 혁명가 이동휘, 매서운 필봉의 논객이자 국사학자인 신채호·장도빈 등등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었을 법한 면면들이 연해주에서 항일독립투사로 활동했다.
연해주지역 의병활동이 절정에 달했던 1907~1908년, 이에 참가한 고려인은 연인원 10만이 넘었고 그들이 일본군과 벌인 전투는 1,700여회에 달했다.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바로 그들의 민족혼이 망국을 독립으로 이끌고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한 배경일 것이다.
일제 강점 시기인 1919년 3월 17일 조국독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모인 국내외 대표 80여 명은 ‘대한국민의회’를 출범시키며 “조선독립”을 선포했다. 세칭 ‘노령(露領)정부’로 통한 이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는 3·1운동 후 최초로 선포된 해외 망명정부로, 이해 4월 17일 상해에서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보다 한 달 앞서 출범한 것이다. 2,000만 조선인의 중앙기관이자 임시정부임을 자처한 대한국민의회는 일제에 대해 조선의 ‘완전한 자주권 회복’을 요구하며 즉각 독립투쟁활동을 개시했다.
연해주고려인 사회의 첫 참변은 1920년 4월 5일 원동주둔 일본군에 의해 빚어졌다. 일본군은 볼셰비키 적군(赤軍)을 공격하면서 고려인의 반일(反日)성향을 제거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新韓村)을 포위하고 대대적인 체포, 방화, 학살을 자행했다. 이때 7천여 명의 러시아 혁명세력과 고려인이 희생되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4월 참변’이다. 연해주의 부호로 항일독립투쟁을 이끌며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를 배후에서 지원했던 최재형이 우수리스크에서 일본군에게 붙잡혀 순국한 것이 이때다. 신한촌은 고려인들의 학교, 신문사, 교회 등이 몰려있던 러시아고려인 사회의 구심점이자 항일민족해방투쟁의 본거지였다. 당시 연해주와 만주를 무대로 활동하던 무장유격대들은 이곳에 와야 무기와 탄약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참변 이후 일제는 고려인 사회에 친일조직을 출현시켜 독립운동기지로서의 신한촌의 역할은 약화되었다.
신한촌 참변은 고려인들에게 시베리아 적백(赤白)내전에서 적군과 연대하여 백군(白軍)·일본군에 공동 항전하는 계기를 강화해주었다. 1919년 17개였던 고려인 무장부대는 1920년 31개로 늘어났고, 1921년에는 빨치산으로만 대략 36개 부대 3,700명이 활동했다. 마침내 1922년 10월 적군과 빨치산부대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입성함으로써 5년간의 시베리아 내전은 막을 내렸다. 고려인들은 조국이 하루 속히 독립되리라는 희망에 불타 있었다. 그러나 적군은 정규군 이외의 무력을 인정하지 않고 동맹군인 고려인 빨치산에 대해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원동해방을 위해 분전했던 고려인들은 반발했지만 더 이상의 군사행동이 불가능했다. 특히 1925년 일·소기본협정 체결 이후 소련이 고려인 무장부대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제재하면서 독립운동과 관련한 연해주의 역사적 사명은 종지부를 찍었다.

1928년 자치공화국 건설운동

연해주의 남우수리 지방은 고려인들이 밀집해 살던 곳이다. 1922년 11월 고려공산당의 한명세는 코민테른에서 `연해주고려인에게 민족적·문화적 자치를 허용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고려인 자치만이 원동에서 일제의 침략음모를 분쇄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러시아공산당 원동국은 “일본이 고려인을 통해 연해주에 첩자를 계속 침투시키고 있다”는 이유로 고려인 자치에 극력 반대했다.
한명세가 제시한 고려인자치주(自治州) 구상에 따르면 고려인이 밀집해 살고 있는 3개 지구, 즉 포시예트, 수찬, 수이푼을 포함한 지역에 블라디보스토크를 주도(州都)로 하는 영토적 자치를 고려인에게 허용하라는 것이었다. 이 제안은 시의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수용되지 않았다.
고려인들의 자치요구는 1928년에 ‘고려공화국’건설운동으로 발전했다. 소련이 하바롭스크 서쪽 비로비잔에 유대인자치주를 건설할 계획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에 자극 받아 일어난 것이다. 그해 3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고려인을 중심으로 만주와 조선의 사회단체 대표들이 모여 열띤 토론 끝에 고려공화국건립청원서를 소련정부에 제출했다. 고려인들은 이 청원에서 일본인, 중국인과 더불어 공산국가를 만들어 원동지역을 개발하고 그 영토를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 청원은 소련정부에 의해 기각되고, 명목상의 ‘포시예트 민족구역’ 지정으로 끝나고 말았다.

강제이주로 민족공동체 무너져

1930년대 중반, 연해주 고려인 사회는 인구 20만의 민족공동체로 성장했다. 자신들의 관습과 전통을 유지하며 커다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잠재력을 지닌 공동체였다. 주민의 90%가 고려인인 포시예트 민족지구에선 초보적인 자치행정이 이루어져 고려어(조선어)로 행정업무가 처리되었다. 고려인들은 모든 수준의 국가 및 사회조직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민족문화가 발전하고 인텔리 층이 견고하게 형성돼 있었다. 다만 경제 분야는 만족할 만한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고려인 작가 김세일은 1923~33년까지 10년간을 고려인 사회의 ‘황금기’로 평가했다. 우선 고려인에 대한 토지분배와 러시아국적 취득문제가 해결되어 당당한 소련공민이 되었고, 고려인의 자치기반이 마련된 것을 근거로 들었다. 또한 고려인 사회가 일제 치하의 조선 못지않게 수많은 교육·문화기관을 갖고 있었고, 7년제 의무교육이 실시된 것도 자랑할 만했다는 것이다. 원동의 소수민족 중 고려인 학생수가 단연 1위였다. 그는 “이 시기에 2천만 조선인 동포 중 우리 소련고려인들이 가장 행복한 처지에 있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강제이주를 전후한 1934~38년은 혼란의 시기, 탄압의 시기였다고 부정적으로 정의했다.
1937년 8월 21일 독재자 스탈린은 원동거주 고려인 18만 명을 모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라는 긴급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은 고려인 이주의 목적을 ‘원동지방에 일본첩자들이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고 내세웠다. 고려인 사회를 일본첩자의 온상으로 보고 그들을 근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격리시킨다는 의미였다. 전략적으로 민감한 국경지역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을 ‘통제하기 어렵고 믿을 수 없는 적성(敵性)민족’으로 취급한 것이다. 일제에 대항해 싸워온 고려인을 일제의 앞잡이로 몬 것은 고려인들에게 감내하기 어려운 모욕이었다.

국가테러리즘의 극치

소련은 강제이주에 앞서 1935~37년에 공산당원, 관리, 장교, 교사, 언론인, 작가, 의사, 기술자 등 지도급 고려인 인사 2,500명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강제이주에 대한 고려인의 저항을 막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그때 체포선풍이 어찌나 심했던지 고려인 주민들은 출입문에서 초인종 소리만 울려도 깜짝 놀라 실신하는 형편이었다고 한다. 기소된 고려인들은 “일본의 간첩이며 관동군참모부의 과제를 받아 연해주 일대를 소련으로부터 탈취하려는 목적으로 무장봉기를 준비하고 있다”는 날조된 혐의 속에 거의 총살형을 선고받고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고려인이 간첩이라고 증명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스탈린정권은 간첩을 처형한 것이 아니라 고려인의 민족의식을 처형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여러 분야에서 성장하던 고려인 인재들이 무더기로 희생되었다.
강제이주는 고려인을 원동에서 제거하려는 오랜 러시아 쇼비니즘의 폭거(暴擧)였고 국가테러리즘의 극치였다. 러시아는 차르시대 이래 고려인을 원동 안보에 해로운 존재로 인식하고 그들의 국경지역 정착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들을 국경지역에서 추방하여 내륙에 가두어 두려고 했던 것은 러시아 위정자들의 일관된 사고였다. 강제이주는 1860년대 이래 원동 고려인들이 온갖 역경을 딛고 쌓아올린 모든 성과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며 폭력적인 파괴행위로서, 소련의 안보와 국가이익 앞에 소수민족의 삶과 인권을 무시한 대표적인 사례다. 강제이주라는 ‘인종청소’가 끝난 후 고려인들이 살던 원동의 606개 촌락은 지도에서 사라지고 쑥밭으로 변했다.
유배지(流配地)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은 거주 지역을 이탈할 자유가 없었으며, 무단이탈은 도망으로 처벌받았다. 고려인들은 비밀경찰의 엄중한 통제 속에 살았다. 공민증을 회수당하고 향후 5년 간 거주지가 제한된다는 도장이 찍힌 신분증을 지녀야 했다. 소련은 고려인의 고등교육 취학과 국가기관 취업을 제한하고 정치적 진출을 봉쇄했다. 그들은 내륙에 갇힌 ‘포로’가 되어 죄수 아닌 죄수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고려인들은 뛰어난 노동열정을 발휘해 농업신화(神話)를 쓰며 자녀교육에 힘써 소련에서 가장 근면하고 우수한 민족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소련 해체 후 연해주 복귀

고려인들이 소련 내 어느 지역에서건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된 것은 스탈린 사망 후 3년이 지난 1956년부터다. 그때 소련 최고회의가 ‘특별이주민’에 대한 거주제한 조치를 해제하자 비로소 고려인에게 정치참여가 허용되고 공직진출의 길도 함께 열린 것이다. 중앙아시아 고려인이 ‘역사적 고향’ 연해주로의 귀환을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다만 법제의 미비로 인해 이때의 귀환은 경제적으로 여유를 가진 일부 고려인들의 개인적 이주에 그쳤다. 그 후 연해주에는 △1959년 6,597명 △1970년 8,003명 △1989년 8,125명의 고려인이 거주했다. 30년 동안 고려인 증가가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은 냉전시절 태평양함대사령부가 위치한 군항 블라디보스토크와 연해주 국경지역의 폐쇄와도 관련이 있다.
고려인에게 연해주 복귀가 공식 허용된 것은 1991년 소련붕괴 이후였다. 소련을 승계한 러시아연방은 1993년 4월 ‘러시아고려인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을 제정해, 강제이주가 불법적이고 범죄적인 조치였음을 시인·사과하고 고려인에게 강제이주 이전에 거주하던 원동지역으로 귀환할 권리를 인정했다. 이에 따라 고려인 지도자들에 의해 연해주 귀환이 추진되었다. 하지만 정작 일반 주민들은 별 호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조상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다시 이주열차를 타기보다는 중앙아시아에서의 안정적 정착을 원했다.
이때 연해주로 돌아가 과거의 포시예트와 같은 ‘민족지구’를 부활하거나 고려인자치주를 설립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연해주에 고려인자치주가 건설된다면 고려인들의 민족적 지위 향상과 권익보호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또한 장차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 옌볜의 조선족 자치지역과 연해주의 고려인자치주를 솥발(鼎足)형세로 엮을 수 있어 문화·경제적 차원의 한민족공동체 건설에 신기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한국 내에서도 고려인들의 자치주 구상을 지지하는 소리가 높았다. 허나 고려인 사회에선 회의론이 많았다. 연해주는 한·중·일·러 4개국이 국경을 맞대는 지역인데다가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구다. 그런 전략적 요충에 과연 러시아가 고려인 자치주 설립을 허용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소수민족의 독립문제로 골치를 앓아온 러시아는 국가적 통일성과 영토적 일체성의 본존을 위해 더 이상 정치적·영토적 자치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으로 선회했다. 결국 1996년 러시아고려인협회는 자치주 주장을 접고 러시아연방의 새로운 민족정책인 ‘문화적 자치’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1920년대부터 자라온 고려인의 자치주 열망은 현실적 기반을 잃고 ‘꿈속의 꿈’처럼 멀어졌다.

멀어진 자치주의 꿈

현재 연해주 고려인 인구는 집계 주체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2010년 러시아연방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1만 8,824명이다. 이는 8년 전 센서스보다 925명이 늘어난 수치다. 우리 외교부의 ‘2013년 재외동포현황’에 수록된 연해주 고려인수는 2만 8,824명으로, 러시아의 2010년 통계보다 1만 명이 많다. 외교부 통계는 추정치다. 러시아 인구센서스 및 이민청 자료를 토대로 하여 각 지역 고려인 단체장 등을 통해 파악한 인구변동상황을 참고해서 산정·집계한 것이다. 연해주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는 고려인 수를 4~5만으로 추정하고 있다. 1991년 소련붕괴 후 2000년까지 중아아시아 각국에서 3만여 명이 연해주로 이주해왔고, 그 후 10년간 약 1만여 명이 추가 유입되었다는 것이다.
고려인 주민의 대부분은 연해주 남부 도시지역에 집중 거주하고 있다. 가장 많이 사는 곳은 중국으로 통하는 국경도시이자 물류 중심지인 우수리스크 일대다. 이곳에 약 2만여 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에 5,000명, 아르튬에 3,000명, 파르티잔스크(빨치산스크)에 3,500명, 나홋카에 5,000명, 스파스크-달니에 1,500명 등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대의 초기 이주민들은 경제난과 더불어 국적취득의 어려움까지 겹쳐 이중삼중으로 고생한 사람이 많았다. 지금은 대부분 시장이나 관공서, 업계 등에 진출해 비교적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다. 무국적자나 장기적인 불법체류 상태로 남아있던 사람도 크게 줄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연해주 당국이 1~2년 내에 국적문제를 해결해준 결과란다. 최근 눈에 띄는 것은 연해주고려인의 한국취업이다. 2014년 12월 31일 현재 한국에 취업목적 등으로 장기체류 중인 러시아고려인 수는 5,200여 명에 달하는데 이들의 상당수가 연해주고려인으로 판단된다. 이들은 한국의 고된 노동에 힘겨워하지만 보고 싶은 고국인데다가 러시아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 때문에 한국취업을 선호하고 있다.

한민족공동체 실험지대

현재 연해주에는 같은 핏줄이면서도 사회적 역사적 배경이 각기 다른 4부류의 한인이 공존하고 있다. 고려인, 중국조선족, 남·북한 주민이 그들이다. 고려인의 경우 3부류가 혼재한다. 소련붕괴 이전부터 터전을 잡아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 토박이, 소련붕괴 후 중앙아시아에서 재이주해 온 ‘큰땅치’, 2차 대전 후 사할린에서 이주해온 ‘화태치’ 등이다. 여기에 중국서 넘어와 단기 체류하며 장사를 하고 있는 조선족, 북한에서 송출된 ‘북선치’, 그리고 남한에서 온 기업, 종교단체, NGO 관계자 등 ‘남선치’가 뒤섞여 연해주 한인 사회는 매우 복잡한 구조 속에 움직이고 있다. ‘북선치’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2만여 명이 진출해 있으며 ‘남선치’, 즉 한국교민은 3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연해주는 한국이 육로로 시베리아와 유럽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 향후 한민족의 해외경제개발과 생활공간 확대에 최적의 후보지로 꼽히는 곳이다. 한국이 연해주에 진출해 경제·사회적 기반을 닦으면 통일 후 남한의 한국인을 필두로 북한인, 연해주고려인, 중국 옌볜의 조선족까지 모두 아우르는 한민족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지역이다. 연해주가 다양한 기원의 한인이 모여 사는 한민족공동체의 새로운 실험지대, 새로운 생존권역으로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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