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닷컴 대표 리동춘(李東春)

“흔히들 ‘중국 조선족의 위기’를 말합니다만, 위기는 바로 기회죠. 위기, 위기라고 떠들다 보면 정말 위기를 맞을 수도 있어요. 따지고 보면 중국 조선족이 위기가 아닌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세상살이가 어쩌면 다 ‘칼날 위에 춤추는 것’인 걸요.”

- OKTimes 2015년 1월호 커버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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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동춘(李東春)
차이나-코리안(www.china-corean.com) 닷컴 대표

‘연변 민들레촌’의 탄생

중국 연길시. 그곳에서 북으로 45㎞의 길을 줄이면 의란진 연화동촌이 나타난다. 바람도 쉬어 가는 심산유곡. 그곳에 ‘연변 민들레촌’이 있다.
‘조선족 생태마을’이다. 50가구 규모로 출발, 오는 2006년까지 300가구로 확대된다고 한다.
“한국의 두레마을(대표 김진홍 목사)에서 이곳 땅 150만 평을 농장용으로 사들였죠. 이중 30만 평을 조선족의 ‘연변 민들레촌’용으로 내준 것입니다.”
조선족-리동춘(李東春·51) 차이나-코리안(www.china-corean.com) 닷컴 대표. 그는 ‘연변 민들레촌’의 산파다.
그를 지난해 연말 서울 종로구 어느 커피숍에서 만났다. 그는 ‘상록수’의 저자 심훈을 떠올리게 했다. ‘계몽주의자’ ‘개혁의 첨병’ 등의 수식어가 딱 어울려 보였다. 조선족인데도 틀림없는 서울 표준말을 구사했다. 그것도 아주 근사하게…
차이나코리안닷컴은 1년 전 창설했다. 자연 생태계와 녹색혁명 노선을 선도하는 계몽성 뉴스 사이트다. 직원이라야 고작 4명이다.
“흔히들 ‘중국 조선족의 위기’를 말합니다만, 위기는 바로 기회죠. 위기라고 떠들다 보면 정말 위기를 맞을 수도 있어요. 따지고 보면 중국 조선족이 위기가 아닌 때가 언제 있었습니까? 세상살이가 어쩌면 다 ‘칼날 위에 춤추는 것’인 걸요.”
조선족의 위기는 중국 산업화의 ‘빛과 그림자’의 한 면면일 뿐이다. 어쩌면 지나쳐야 할 수렁이기도 하다. 특히 조선족 공동체인 농촌의 해체는 모국인 한국이 있어 더욱 그 속도가 빨랐다.
“한·중 수교 이후, 정확히 중국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조선족은 땅을 버리고 도시로, 도시로 떠났습니다. 선조들이 이국땅에서 피땀으로 일궈놓은 그 땅을, 미련없이 던지고 떠난 겁니다. 그러나 그건 더 나은 미래로의 탈출구였죠.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누가 막겠습니까?”
조선족이 버린 땅은 이내 중국 국가에 회수된다. 사유지가 아니라 국유지인 까닭이다.
“그냥 주는 땅을 왜 버립니까? 땅도 보전하고 돈도 벌면서 중국에 정착하는, 양수겸장(兩手兼將) 책을 모색해야 합니다. 플러스적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는 거죠. 이를테면 ‘도농(都農) 균형 발전’이 대안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한국의 매스컴은 조선족이 이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보도하고 있다. 실제 그럴 개연성도 없진 않다. 그러나 조선족 모두가 땅을 버리고 떠나는 것은 아니다.
“떠나는 자들의 땅을 사들여 ‘조선족 농장 형태’를 구성하자는게 제 복안입니다. 이 문제는 중국 정부가 대신해 줄 수도 없고, 조선족 민간 차원에서 고민해야 될 일입니다.”

5만 명 규모의 집중촌

현재 조선족은 1인당 평균 1천 평 정도의 농토를 가지고 있다. 조선족은 그동안 사회주의 체제 아래서 시키는 일만하면 됐다. 이 같은 관성은 개혁개방이후 ‘카오스’를 초래했다. 일종의 ‘무정부 상태’를 경험한 것이다.
‘연변 민들레촌’은 ‘연변 중한 생태 농공상(農工商) 관광사업 특구’의 한 모서리다. 이 특구는 2020년까지 5만 명이 모여 사는 집중촌이 목표다. 농경공동체에서 산업공동체로, 생태와 과학이 융합하는 제3형태의 공동체, 웰빙시대에 대비하는 탈 이념적 공동체인 것이다.
“이곳엔 조선족뿐 아니라 한족도 더불어 살 겁니다. 이념도 뛰어 넘고 배타적이 아닌 포용적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 곳 땅은 중국 정부로부터 50년 간 임차한 겁니다. 전기, 인터넷 등 이미 상당한 인프라가 깔려 있습니다.”
이곳엔 유기농업 연구소, 촌장 아카데미도 개설된다. 5~10만 평 규모의 민들레 녹색 산업단지를 조성, 황태, 각종 젓갈류와 된장류 등 전통 가공식품과 오리고기 등 무공해 농축산물을 생산 가공 유통하는 통합시스템을 구축한다.
한국엔 이미 유기 농산물 브랜드 시대가 도래했다. 중국도 예외일 수 없다. 연변 조양천의 ‘천궁표 쌀’, 흑룡강의 ‘김씨 미업’, 흑룡강의 ‘오리쌀’ 등은 이미 브랜드 가치가 부여됐다. 조선족의 브랜드 중 ‘연변 황소’ ‘전통 음식’ 등은 이미 유명하다.
“21세기는 생태와 문화 디지털이 융합되는 생태문화과학의 시대이자 농촌과 도시가 통합되는 시대가 될 겁니다. 유기농과 자연 농법 및 녹색산업을 발전시키면서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건강한 먹거리와 자연 친화적인 주거 공간부터 시작해 생산, 생활, 문화, 오락과 교육이 일체화한 초록마을 공동체를 건설해 나가는 것이지요.”
이 특구 조성 계획은 결국 조선족 농촌 살리기와 무관하지 않다.
“중국 곳곳에 이 특구와 같은 공동체마을을 건설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하드웨어도 중요하지만 소프트웨어가 더욱 절실합니다. 이제 세계는 소프트웨어 시대로 전이했습니다. 조선족 농촌 살리기는 결국 농촌지도자 및 농업 경영인 양성이 핵심입니다. 이들을 통해 조선족 농업인들의 사고방식을 하루 빨리 바꿔야 합니다.”
시인 김지하는 언젠가 말했다.
“생태 농업을 하더라도 철학과 사상이 있어야 한다. 철학과 문화가 함께 하지 않으면 결국 이는 상업주의로 흐르고 말 것이다.”

‘제 목소리’ 내는 조선족들

리동춘. 흑룡강성 해림시 태생. 그곳은 김좌진 장군이 죽음을 맞이한 곳이다. 그 연유로 ‘김좌진 장군 연구회’가 있다. 그는 이 연구회 부회장이다. 7남매 중 셋째였다. 아버지는 농투성이였다.
리동춘, 초등학교 4학년 때 문화혁명의 돌풍이 일었다. 식자층을 경원시하는 풍토 탓에 그는 정규 교육과 멀어졌다. 뒤에 해림시의 조선족 고중을 졸업했다.
스물한 살에 공산당에 입당, 이어 청년돌격대장이 된다. 논을 규격화하는 운동이 앞장섰다. 스물두 살에 공산당 청년대 서기가 된다.
어느새 그는 ‘청년지도자’로 부각됐다. 그러다 문득문득 ‘공부를 못한 것’이 가슴을 쳤다. 틈틈이 독학을 했다. 목에 차는 정열로 가슴이 늘 뛰었다. 스물 넷이 되던 해 느닷없이 결핵성 늑막염이 그를 찾아왔다. 죽을 고비까지 갔다. 폐인이 되다 시피했다.
주변은, 사회는 차가웠다. 지독한 냉대에 그는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그러면서 3년간 이를 갈며 ‘일어서는 연습’을 했다. 드디어 그는 재생했다. 회계학 공부도 했다.
조선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서른살에 신합촌 촌장이 됐다. 촌장은 아무나 되는게 아니다. 특히 ‘어버이 관’을 가지지 않으면 자격 미달이다.
어느새 그는 ‘조선족 리더’가 돼 있었다.
1997년 신도시 ‘백두산 타운’을 구상했다. 몇 개의 조선족 도시를 통합한다는 것이었지만 처음엔 주변의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그는 실행에 옮겼다. 해림시 서부지역에 조선족 신도시를 만들었다. 3년 새 아파트 10동, 500가구가 들어섰다. 산업공단도 들어섰다. 조선족촌 어디서나 줄기만 하던 조선족 학생수도 늘어 났다.
10년 후 3천 가구쯤 수용 규모의 신도시가 될 것이라 그는 믿고 있다.
“이 신도시를 모델로 조선족 신도시가 더욱 늘어나야 합니다. 신도시 확산 성공의 열쇠는 지도자에 달려 있습니다. 이미 저는 젊은 지도자를 키우고 있는데 한국에 연수도 다녀오게 했습니다.”
2002년부터 한국에선 조선족 농촌지도자 연수를 시행하고 있다. 지금껏 3회 40명이 연수를 받았다. 그는 지난해에도 10명을 데리고 한국을 다녀갔다.
“조선족 연수생들에게 처음 보여준 것이 ‘새마을 운동 사례’였지요. 자조협동 정신을 깨우치게 했죠. 한국의 농촌도 답습케했습니다. 한국에선 이미 유기농, 친화경농법이 진행되고 있어 배울게 많았지요. 그러나 한국의 농촌 환경은 솔직히 중국의 그것보다 낫다고 할 순 없죠. 한국엔 다락밭이 많은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충남 영농조합에서 배운 ‘한살림’ 모델은 도농 통합형이었다. 그리고 흙 살리기에 중점을 둔 ‘흙 살림’ 모델도 좋았다.
그는 지난해 1월9일 중국 장춘에서 ‘조선족 발전 심포지엄’도 열었다. 조선족은 물론 한국 농업관계 인사 등 300여 명이 참석,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조선족은 조선족이다

“왜 2년 전, 한국에서 조선족의 국적 회복 운동이 일었잖아요? 이는 결국 1회성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 후유증은 적지 않았습니다. 중국에서 살 수밖에 없는 조선족들에게 적잖은 낭패감도 안겨줬지요. 조선족은 조선족으로 존재해야만 중국과 한국에 모두 좋은 겁니다.”
그는 한국의 재외동포법도 늘 마땅치 않다며 이 법을 만들 때 과연 조선족의 현실을 정확히 알고 만들었나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고 한다.
“조선족은 중국 내 어느 소수민족보다 우수합니다. 역사적으로 북방지역의 황무지를 개간해 벼농사의 선구자 역할도 했지요. 중국의 개혁개방 때도 행동력 및 적응력이 아주 빨랐습니다. 그러나 조선족은 ‘한중 수교’로 한국 사회와 만나면서 너무 앞서 나간 탓에 숱한 부작용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조선족이 도약할 기회를 포착했는데도 이를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했지요. 여기엔 한국의 재외동포정책 부재도 한 몫 했습니다.”
그는 한국에 드나들며 아직도 조선족 불법체류자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이 늘 맘에 걸린다.
“불법체류자 문제 해소 방안은 물질적 접근이 아니라 정신적 접근에서 해답을 찾아야 할겁니다. 특히 조선족 불법체류자들은 당장 부모 자식간, 부부간 생이별 등 가정파탄까지 이르는 등 벼랑 끝에 몰려 있습니다. 한국에서 불법체류자 문제 해법을 제시하지 않을 경우 어쩌면 한국 정부가 조선족을 망쳤다는 소리까지 들을 수도 있을 겁니다.”
조선족은 그동안 한국 진출 10년이 넘었는데도 ‘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제물에 두렵고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보다 못해 한국인들이 목소리를 대신했다. 이로인해 중국정부의 곱지 않은 시선까지 낳았다.
그는 최근 ‘재한조선족경제문화발전협의회’를 구성, 한국에 체류하는 조선족의 ‘제 목소리 내기’를 돕고 있다. 이젠 한국에 체류중인 조선족도 중국과 한국에 할말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족이 한국 내 취업을 통해 1회성이 아닌 영구성을 가진 기술을 습득케 하도록 한국 정부가 도와줘야 합니다. 그래야 중국에 돌아가서도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겁니다. 나아가 한국 농촌과 중국 조선족 농촌의 교류를 통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해 보는 것도 좋을 겁니다.”
그의 말대로 중국의 개혁개방, 구체적으로 조선족의 한국으로의 이입에 따른 피해는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이 더 컸다.
한국에 체류 중인 조선족들은 3D업종에만 종사하다보니 ‘한국의 평균 정서’에도 못미치는, 말하자면 ‘물정 모르는 사람’이 됐다.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서는 중국에서의 적응력마저도 뒤지는 ‘안팎 곱사등이’가 된 것이다.

거문고 줄을 다시 매야

“조선족은 희망적입니다. 동북아 시대를 맞아 더욱 그렇습니다. 조선족은 땅도 있고 여기다 선진화된 모국-한국이 버텨주고 있어 정신적 버팀목이 되고 있습니다. 동북아 시대에 중국에 발디디고 있는 한국인들은 이미 30만 명을 넘어섰다. 여기다 탈북자가 20~30만 명에 이른다.
“조선족 3, 4세는 1세와는 달리 중국어 구사능력도 뛰어나고 물론 중국 환경에의 적응력도 한족들 못지않지요. 앞으로 조선족이 동북아시대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건 가상이 아닙니다. 현실입니다.”
그런데도 정작 한국에선 ‘조선족의 위상’이 폄하돼 있다는게 그의 진단이다.
“‘조선족’을 한국에선 대접한답시고 호칭을 ‘중국동포’로 하고 있는데 호칭 바꾸는 게 무슨 대수입니까? 조선족은 한국인도 중국인도 아닌 조선족일 뿐입니다.”
연변은 중국 내 조선족자치주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을 안고 있다. 그러나 이는 실상 중국 정부의 문제가 아니다. 조선족 내부의 문제일 뿐이다.
조선족은 제물에 문제를 야기하고 제물에 중국의 눈치를 보지는 않았는가. 그래서 정작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을 방기하지는 않았는가.
“누군가는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조선족이 곧 붕괴될 것 같이 호들갑을 떠는데…. 조선족의 역사가 얼마입니까? 이미 50년이 넘었지요. 간단치 않습니다. 그 세월동안 지금보다 더한 질곡과 어둠을 뚫고 살아남은 조선족들입니다. 글로벌시대에 나라와 민족의 한계를 넘어서 조선족은 다시 번듯하게 일어설 겁니다.”
연변 두레마을뿐 아니라 중국에선 새로운 조선족 집중촌 바람이 일고 있다. 2003년 한국 YTN은 리동춘을 ‘세계 속의 한국인’ 모델로 방영했다.
여기서 질문자가 ‘당장 뭐가 불편하냐?’고 그에게 묻자 ‘중국 조선족 사회엔 NGO문화가 없다. 내가 돈 없이 NGO를 하려니 너무 힘에 부친다’고 답했다.
그는 앞으론 조선족 외국 유학생들이 ‘조선족 NGO집단’을 대체할 것이라는 기대에 차 있다.
그는 건강기능식품을 취급하는 ‘녹정물산’을 인천에서 오픈했다. 동생-동국(64년생)에게 이 회사를 맡겨두고 있다. 이외 중국의 생강을 한국에, 한국의 어망을 북한에 수출하는 등 한국, 북한, 중국 간의 삼각 무역도 곁들이고 있다.
그의 큰 아들 영범(23)은 목단강시에서 꽃가게를 하고 있다. 둘째아들 영광(21)은 음악도로 목단강시 조선족가무악단에서 연수중이다. 한국 덕원예고에서 3년 간 공부하기도 했다.
“조선족에겐 강한 변혁이 필요합니다. 이제 ‘거문고 줄을 고쳐 팽팽하게 맨다’는 해현경장(解弦更張)의 정신으로 다시 뛰어야 합니다.”

<해외교포문제연구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