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조류학자의 손녀, 네 번 성(姓)이 바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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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Camp(원영화)
온타리오주 종합보험사

나는 본래 성이 원(元)씨다. 해방되던 해 12월 북한에서 태어났다. 한참 중국에서 흑사병이 극성일 때 아버지는 쥐의 생태를 연구하기 위해 중국 산간 벽지로 출장을 가셨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때 같이 갔던 아버지 친구가 전한 얘기론 일본이 패전하자 현지에서 일본인을 보복하는 와중에 아버지는 일본인으로 오해 받아 산에서 내려 오다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젊은 26살에 나이에 유복자로 남편없이 다섯째인 나를 낳으셨다. 그 나이에 아이 다섯을 힘겹게 거두는 어머니를 보다 못한 할아버지는 아이들을 대신 맡기로 하고, 어머니를 남한의 친정으로 내려 보내셨다. 월남해 살고 있는 친정에서 새 출발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도 울어대는 나를 떼어내지 못한 어머니는 사람을 사서 나를 등에 업고 38선을 넘었다 한다. 큰아들이, 그러니까 나의 큰 오빠가 10살 되던 때다. 어머니는 남한에서 자리를 잡는대로 아이들을 하나씩 데려 오리라고 작정하셨다 한다.
키는 작지만 워낙 곱게 생기신 어머니는 얼마 안가 역시 북한에서 내려 온 키 큰 남자를 만나 살게 되었다. 내가 학교에 갈 나이인 7살로 이때 새 아버지 성인 이(李)씨로 바꾸었다. 네 아이를 북에 두고 온 어머니는 나를 끔찍히 여기시고 허드레일은 절대로 시키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나를 별로 예뻐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중학교에 합격했는지를 알고자 학교에 들리셨다는 말을 듣고 처음 마음이 흡족해진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어릴적부터 유난히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집 골목을 돌아 올 때 들려 오는 피아노 소리는 환상 그 자체였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하고픈 일들을 할 수 없었으나 다른 재능의 길이 찾아와 주었다. 중2학년 때 교내 방송대회에 나가 우승해 방송국으로 진출하는 행운을 얻게 된 것이다. 당시는 4·19 직후였고 아직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이었다. 해외로 전파되는 국제방송국에서 북한으로 보내는 편지를 낭독하는 한 소녀의 일기 주인공이 됐다. 북한에 있는 언니에게 동생 이영화가 보내는 일기였다. 물론 성이 바뀐채였지만.

한국 최초 조류학자 원홍구 할아버지

방송으로 바삐 활동하던 고등학교 시절. 그러나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그 당시 학업에 흥미가 없었던 이유를 선생님 탓으로 돌리곤 한다. 공부 의욕을 불러 일으킬 만한 선생님이 불행히도 없었다는 것이 내 핑계다. 그럭저럭 여고를 나와 K대학 제2지망인 생물과에 겨우 입학했다. 그것도 K대 교수이던 삼촌 덕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생물과는 나의 적성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일생 결코 잊지 못하는 사건이 생겼다. 어느 날 경기도 광주에 있는 산으로 과에서 야외 채집을 갔을 때다. 어느 학생이 삐라를 주웠는데 그것은 북한에서 날려보낸 편지였다. 놀랍게도 나의 친할아버지가 서울의 막내 아들인 내 삼촌 K교수에게 쓴 편지를 제자인 학생들이 줍게 된 것이다. 이후 그 삐라를 어찌하다 잃어 버렸는지 모르겠으나 내 기억으로는 다음 글이 쓰여 있었다.

「내 아들 병오 보아라. 나는 네 이름과 똑 같은 동명이인이 있는 것인가 의아해 왔지만, 네가 나의 아들이라고 확신하며 이 글을 쓴다. 아들인 너에게 글을 전할 수 없어 너의 손에 닿기를 바라며 이렇게 하늘로 날려 보낸다. 내가 이북에서 새로운 새를 잡아 이름을 붙였단다. 그런데 너 또한 남한에서 똑같은 새를 잡아 이름을 지어 주었더구나. 물론 이름이 달랐지. 그때 나는 내 아들이 남한에서도 나와 같은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새들은 남북으로 막힘이 없이 자유롭게 날아 다니는데 우리에겐 38선이 가로 막혀 있구나. 살아 생전 우리가 다시 볼 날이 있기를 바란다.」
필자 원영화의 할아버지이자 북한 조류학자인 원홍구박사가 1970년 사망했을 때 김일성은 조화를 보내 조의를 표했다.
남한에는 원병오박사가 대표적인 한국조류학자로 서울에 거주하며, 전 박정희 장군 전속부관을 지낸바 있다.

이 사건은 1963년도의 일이다. 할아버지(원홍구)는 1970년 3월 평양에서 돌아가셨다. 내 아버지만은 일찍 여의셨지만 세 아들을 모두 남한으로 떠나 보내고 내 친형제들인 네명 손자들을 함께 일생을 북에서 조류연구에만 바친 할아버지다. 북한에선 할아버지 업적을 높이 사서 80년대에 북한 아버지 일생과 남한의 아들 얘기를 각색해 “새”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었다. 나는 지금도 북한 형제들 생각이 날 때면 가끔 이 영화를 꺼내 본다.

나는 중학교 때 부터 외국으로 나가길 꿈꾸어 왔다. 우리 나라는 땅이 좁고 사람은 너무 많아 애국하는 길은 넓은 세계로 나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일찍 방송인으로서의 성공과 미련을 버리고 G대학 영문과로 옮겨 영어공부에 치중했다. 그 당시 외국행은 굉장히 어려웠다. 그런데 미국 유학을 위해 4학년 말 유학 시험을 치렀는데 운이 좋았는지 첫 번에 합격했다. 그러나 3년을 더 집안 살림을 도우면서 영어 실력을 닦고 있던 중 드디어 아버지가 비행기표를 사 주셔서 미국으로 향했다. 단돈 200불을 들고 1970년 12월 19일 드디어 미국 유학을 떠난 것이다. 미련없이 김포공항으로 향하면서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 가는 수출목표 1억불이라는 전광판 숫자가 깜박이던 것이 나의 뇌리 속에 남아 있다.
당시 캐나다에서는 잠시 동안 이민 문호를 여행자에도 열고 있었다. 일주일 시카고에서 조금 안면있는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 나에게 토론토에 먼저 와 계시던 선생님이 내 일자리를 마련해 놓으시고 무조건 오라는 것이다. 내 형편을 잘 아셨고 나 또한 공부가 목적이 아니어서 당장 캐나다로 날아 갔다. 그때 내게 남아 있던 돈은 70불이 전부였지만 두려운 마음이 없었다.

넓은 세계로 나가는 것도 애국

내 캐나다 생활은 처음부터 순조로운듯 했다. 한국어 방송에 영어 자막을 내 목소리로 넣는 방송보조 파트타임으로 며칠 만에 일을 시작하고 이민도 통과했다. 8개월만에 영주권을 받고 곧 가족도 초청할 수 있었다. 파트타임으로 버는 수입의 절반을 집으로 보내면서 집안을 도울 수 있어 기뻤다. 고국을 떠난지 한 달만인데 정말 행운이었다.
그리고 다음해 4월 정식으로 보험회사 사무원으로 취직해 누군가의 소개로 호감이 가는 잘 생긴 한 남자를 만났다. 그가 바로 그해 12월에 결혼 한 남편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나와 같은 ‘영화’였다. 성만 달랐다. 주위에선 이영화가 하영화에게 시집을 간다고 재미있다고 깔깔댄 것이 엊그제만 같다. 하여간에 총각이 별로 없던 그 당시에 날씬한 것 말고는 별로인 내게 멋진 왕자가 나타나 결혼을 하자니 얼마나 기쁜가.
그 당시 내 결혼관은 신앙과 건강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한참 젊었고 무엇이든 하면 된다는 신념이어서 결혼에 골인하고 내 이름은 미세쓰 하(河) 영화가 된 것이다. 모가 나지 않는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그런대로 아이 둘 낳고 평범하게 지나는 듯하다가 16년 만에 끝이 났다. 몸이 조금씩 불어 나던 남편이 심장에 이상을 느껴 병원을 드나들더니 6개월만에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당시 나는 남편과는 별도로 건강식품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한참 사업의욕에 불타 매진하고 있을 때여서 남편의 사별을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마침 중동전쟁이 터질 당시였고 신문에선 해로운 농약에 대한 시비로 미국 LA에서 비행기로 주 1회 공수해오던 무공해 야채를 2회로 늘려야 했다. 그렇게 바쁘게 장사에 매달려 있었다. 그래서 한창 예민한 나이인 내 아이들에게는 정작 신경을 쓰지 못했다. 나는 사내아이들을 엄마의 치마폭에 키울 생각이 없었고 또 자기 인생은 자기가 찾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자유 논리였다. 이러한 주장은 나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고 아들 하나는 이런 엄마를 못마땅해 했다. 그는 시대나, 환경에 굴하지 않고 도전하는 개척자적 성격 소유자인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즐길 것은 즐기며 천천히

나는 내 아이들 장래에 내 남은 인생을 의지하기보다 내가 먼저 행복해 지기로 결심했다. 43살의 미망인. 혼자라고 써 붙이고 다닐수도 없고 해서, 짝을 찾아 주는 캐나다 결혼상담회사에 문을 두드렸다. 요즘이야 흔하지만 1990년은 거금을 내고서야 회원이 되고 입력한 정보에 의해 적합한 상대를 소개받는 것이다. 이 회사를 통해 바쁜 가게일로 정신없는 내게 첫 번째로 와 준 사람이 현재의 남편이다. 내 나이 45살이었고, 그는 51살이었다. 퍽 소심하고 내성적인 사람이지만 그는 정말 신사였다. 그는 시골집으로 가는 도중 차를 세우고 들꽃을 꺾어 내게 주며 부끄러워 하던 사람이고 100년 된 낡은 집을 사서 자기 손으로 직접 고치던 평범한 캐나다인이다. 못하나 제대로 박을 줄 몰랐던 전남편에 비해 손수 집을 지을 수 있는 그의 거치른 손을 보며 생활력있는 남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달 만에 내가 먼저 마음의 결정을 내리니 친구가 펄쩍 뛰며 반대한다. 생김새는 그렇다 치고 머리가 반은 대머리여서 결코 내 타입이 아니란다.
내가 고든 캠프(Gordon Camp)와 결혼 한지도 벌써 18년이 흘렀다. 행복의 잣대를 결코 외모나 겉에 보이는 아름다움에 주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행복하다고 느껴야 한다. 내가 만일 물에 빠져 죽어 간다면 고든은 기꺼이 나를 건지고 죽을 수 있는 사람이다. 요즘은 그가 질병으로 거동이 불편해서 내 혼자 외출할 때면 매번 ‘Take time’이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즐길 것을 다 즐기고 천천히 돌아오라는 말이다. 이 한마디로도 내 마음은 뿌듯하다. 또 하나 내 별난 행복의 조건은 자유다. 생각할 자유, 행동할 자유, 먹는 자유 등등인데, 이런 자유가 결국 사업의 완전 실패를 맛보게 한 결과도 되긴했다. 하지만 착한 남편은 그 실패도 수용하고 비난하지 않는다. 사업이 잘 될 수도 있었는데 하면서 남편은 직장으로 돌아갔고, 나는 55세에 사업에서 손을 뗐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캐나다 생활 45년을 돌아 보며 내가 왜 사업의 성공을 바랐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우선 북한에 살고 있는 형제들을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돈을 벌어야 한다고 믿었다.
내가 Mrs. CAMP가 되고 알콩달콩 행복하게 나머지 인생을 살고 있다고 쓰고 싶지만, 요즘 남편의 건강이 좋지 않다. 남편은 그런 중에도 소설을 써서 출판을 하고 나는 한여름 고생을 하며 번역작업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 하다. 내가 가게를 할 때 손님 중에 한 독일 할머니는 어렸을 적부터 배우고 싶었던 바이올린을 배우러 다녔는데 무척 행복해 보였다. 유난히 굵어 보이던 그 할머니의 손가락을 떠 올리며 무디어진 내 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 본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요, 만족이다. 나이 들어 지금에야 시간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노래하고, 바느질하고, 글을 쓴다. 일 초의 시각이 헛되지 않게 의미있는 인생을 산다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행복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다면 그것이 정녕 바람직한 인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